숨쉬는 우리그릇… 5대째 甕고집집집마다 이사 갈 때는 장독을 제일 먼저 챙겼다. 그 것이 우리네 풍습이었다. 간장 고추장 된장 김치 등이 담긴 항아리는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살림살이였으니 당연했다. 여인들의 손길이 저절로 장독대에 자주 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 장독의 때깔도 고와졌다. 항아리, 독과 같은 옹기(甕器)는 부엌살림을 지탱해온 기물이었지만 편리함을 앞세운 생활방식에 밀려 점점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
"옹기는 사람의 피부처럼 숨을 쉽니다. 표면을 손으로 만져 거칠게 느껴지는 곳엔 예외 없이 숨구멍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간장이나 된장을 담가 놓으면 항아리 표면의 여기 저기에 흰색의 소금꽃이 피는 겁니다. 예전엔 할머니들이 소금꽃을 보고 항아리의 됨됨이를 가늠했거든요." 반세기 넘게 옹기장이로 살아온 '양협토기' 대표 유수봉(柳壽奉·58·경기 안성시)씨는 옹기의 탁월한 효능과 가치를 외면하는 세태가 너무 안타깝다.
스테인레스와 플라스틱 용기의 발달에 이어 김치냉장고까지 등장하면서 옹기의 수요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한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옹기의 납성분은 잿물유약이 아닌 광명단의 사용이 그 원인이었다. 옹기를 사양길로 내몬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광명단을 입힌 옹기는 숨구멍이 막혀 소금꽃이 피지 않는다. 잿물유약을 고집해온 양협토기는 사람들이 믿지 않자 아예 요업기술원에 옹기의 성분을 분석하는 시험을 의뢰했다. 결과는 깨끗했다. 납은 물론 카드뮴, 비소 등 유독성 물질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유씨의 조상들은 한 세기가 훨씬 넘도록 옹기 굽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왔다. 유씨가 5대째지만 줄여 잡아 그 정도다. 가업은 신앙의 산물이었다. 황해도에 거주하며 일찍 천주교에 귀의한 선대 어른들은 19세기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었고 생계유지 수단으로 옹기를 굽기 시작했다. 옹기의 원료 점토(진흙)는 지천에 깔렸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감시의 눈초리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유씨의 선친(柳忠烈·유충열)대에 이르러 비로소 안성에 정착, 마음 놓고 옹기를 구워낼 수 있었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의 총칭이다. 질그릇은 점토로 빚어 그대로 구운 것이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잿물유약을 입혀 구워낸 용기다. 질그릇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요즘은 옹기가 오지그릇을 일컫는 말이 됐다. 옹기는 용도에 따라 항아리 독 자배기 동이 단지 등 주방용기에서부터 필통 연적 화분 풍로 담배통 등 생활용기에 이르기까지 수십종이나 된다. 양협토기에서 나오는 옹기 중 제일 큰 항아리인 대자리는 용량이 260리터로 주로 양조장에 많이 팔려간다.
아무래도 김치와 장을 담는 업체가 큰 손이다. 양평의 한 김치공장은 대자리 2,000개를 사가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국내 수요보다 많다. 덩달아 허리도 좀 펴졌다. 일본에선 옹기가 정종을 담고 보관하는 용기로 쓰이고 있다.
유씨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끝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공부를 아주 잘해 선생님들이 학비를 대줄 테니 진학을 시키자고 그의 부친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옹기장이의 길은 혹독했다. 호통이나 야단은 밥 먹듯 다반사였고 그 보다 더한 시련도 감내해야 했다.
6대째 대물림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相根·상근·29)이 그의 곁을 지킨다. 원주 상지대 공예과에서 도자기를 전공한 아들은 가마의 불을 책임지고 있다. 아들이 옹기장이로 홀로 서기까지에는 오랜 수업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듬직하고 대견스럽기만 하다.
양협토기는 90년대 초 재래식가마를 철거했다. 7, 8일이나 불을 때야 하는 재래식가마는 원료인 장작을 구하기도 어려운데다 연기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주민에 피해를 주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대신 기름을 원료로 하는 기름가마를 설치했다. 135리터짜리 항아리를 기준으로 할 때 하루에 14개를 구워낸다. 유씨는 조만간 경기도와 안성시의 지원을 받아 전통옹기 시연장을 내고 전통가마를 재현할 생각이다.
70년대 후반만 해도 안성시 보개면 양복리 일대에 옹기업소가 3개나 됐다. 유씨는 "제 기억에 세 집 모두 안성이란 지명을 상호에 붙이기를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 집이 의논 끝에 가마의 규모로 따져 안성토기 보개토기 양협토기의 순서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 집은 제일 규모가 작아 부락 이름인 양협을 사용한 거지요"라고 설명한다. 두 집 역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옹기 굽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왔다. 그나마 옹기장사로 생계유지가 어렵자 가업을 포기해야 했다. 근근 버텨오던 유씨도 IMF환란을 맞으면서 가업 포기를 고민했다. 그러나 배운 것이라곤 이 일 뿐이니 대안이 없었다. 그 무렵 신앙이 위기극복의 큰 힘이 돼 주었다.
"잘 익은 옹기는 밤색이나 검정에 가까울 정도로 색이 짙습니다. 손이나 작은 돌로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가 납니다." 유씨는 지금 옹기장이로서 생전 처음 보람을 느끼고 있다. 양협토기의 옹기가 중국산을 젖히고 일본에서 최상품으로 평가 받으면서 그런 자부심이 생긴 것이다. 가업이 전통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도 갖게 됐다.
우리 조상들은 항아리가 미끈하고 장독대에 햇볕이 잘 들어야 집안이 번창한다고 믿었다. 그만큼 장독대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래서 옛 여인네들은 보름이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장독대에서 으뜸의 위치를 차지했던 옹기는 이렇듯 선조들의 삶의 향기와 지혜를 간직한 그릇이다.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통풍·방수 OK… 옹기의 과학
옹기 빚기의 첫 공정은 점토의 매질인데 점착력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다. 이어 돌이나 불순물을 골라내는 께끼질로 옮겨간다.
모래나 돌부스러기는 그대로 남는데 이런 미세한 불순물이 도자기와 달리 옹기의 숨구멍(기공)을 확보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성형이 된 옹기는 20시간 정도 말린다. 그런 다음 유약을 입혀 큰 옹기는 1주일, 작은 것은 4, 5일 정도 더 말린 뒤 가마에 넣는다. 잿물유약은 소나무나 참나무를 태운 재에 황토성분의 약토와 맥반석을 넣어 만든다. 볏짚이나 나뭇잎에서 나온 재는 절대 금물이다. 재래식가마와 달리 기름가마는 하루에 한 번 11∼12시간 불을 지피면 된다.
처음 5∼6시간은 섭씨 600도에 이를 때 까지 서서히 불을 땐다. 온도가 700도에 이르면 옹기는 붉게 달구어진다. 이 때부터 다시 5∼6시간 더 불을 지펴 1,200도에 다다르면 옹기는 하얗게 변한다. 불이 잘 먹었다는 징표다.
옹기의 통풍성과 방수기능은 KBS가 한 연구소와 공동으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입증한바 있다. 옹기의 통풍성은 옹기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 있는 숨구멍이 좌우한다. 잿물유약은 방수기능과 숨구멍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잿물유약이 잘 발라진 부분은 방수기능이 완벽하고 덜 입혀진 곳에는 숨구멍이 확보된다. 숨구멍은 점토를 매질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모래나 돌부스러기 등 굵고 거친 입자에 집중 분포돼 있는데 이런 부위에는 잿물유약이 잘 먹히지 않는다.
숨구멍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옹기는 결코 새지 않을 뿐더러 빗물이 스며들지도 않는다. 공기는 받아들이되 물은 통과시키지 않는 것이다. 옹기 입자크기가 빗물 입자의 2,000∼200분의 1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산소와 소금 등의 입자는 옹기입자의 1만분의 1도 못 된다. 숨쉬는 옹기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옹기는 식품의 신선도와 보존성을 높여주고 김치나 간장, 된장 같은 발효식품의 숙성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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