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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10> 4·19와 적십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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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10> 4·19와 적십자사

입력
2004.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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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적십자사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4·19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 이후 소용돌이치던 학생 시위에는 자연히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도 가담하고 있었다. 부상자도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시위 현장에 앰뷸런스를 보내 부상당한 학생을 구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부상당한 경찰관도 함께 치료하자고 했다. 그러나 보사부 장관을 겸하고 있던 손창환(孫昌煥) 총재는 "외국 차량에 불을 지르는 자들은 빨갱이 아니냐"며 거절했다.

마침내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하야했다. 나는 신문 호외를 보고 눈물이 났다.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보낸 이 박사가 민정을 살피지 못해 독재자로 몰려 하야하는 처지가 서글펐다.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崔仁圭) 내무장관의 주도로 내각에서 결의한 사항이었다. 손 총재도 장관을 겸임하고 있으니 책임이 없을 수 없었다. 청소년부장인 나는 총재에게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새 총재를 뽑도록 하자고 주장하며 다른 부장들과 협의해 총재님을 나오시라고 했다. 다음날 회의에 나온 손 총재는 "무슨 일로 나오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말이 없어 내가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각에서 부정 선거를 결의했으니 각료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래도 총재를 그만두시고 새 총재를 뽑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이 박사가 총애하던 변영태(卞榮泰) 전 국무총리가 한국일보에 '이 박사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3회나 썼다. 전직 총리까지 이러는데, 총재님도 그만 사임하시는 게 좋지 않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손 총재는 "내가 뭘 잘못했나"며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 그는 내각의 다른 각료들과 함께 구속되고 말았다.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극상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얼마 뒤 손 총재의 가족에게서 손 총재가 "감옥에 들어와 보니 미스터 서의 말이 옳았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 뒤 병환이 들어 보석으로 병원에 계실 때 위문하러 가기도 했다.

후임 총재를 선출하는데 많은 진통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유각경(兪珏卿) 부총재와 부장들이 협의해 좋은 총재를 뽑자고 했다. 먼저 변영태씨에게 중앙위원 2명을 보내 교섭했지만 "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라며 사양했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장준하(張俊河) 선배와 오종식(吳宗植) 한국일보 주필에게 상의했다. 두 분 다 최두선(崔斗善) 동아일보 사장이 적임이라고 했다. 중앙위원 두 분을 보내 교섭했더니 최 선생은 동아일보 사장을 겸임하고, 중앙위원 전원이 찬성하면 총재직을 맡겠다고 했다.

그런대 걸림돌이 생겼다. 당시 허정(許政) 과도내각에서 보사부 장관으로 있던 김성진(金晟鎭)씨가 육군 군의감을 지낸 친구 윤모씨를 총재 후보로 추천했다. 중앙위원회에서 투표를 했더니 최두선씨가 9표, 정부에서 민 윤씨가 5표, 또 다른 두 후보가 각각 2표씩 나왔다. 투표에 참가한 위원들 가운데 정부 장관이 6명이었는데 한 명이 윤씨를 찍지 않은 뜻밖의 결과였다. 재투표에서는 최두선씨 11표, 윤씨 5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관중 윤씨를 찍지 않은 분은 국방장관으로 있던 이종찬(李鍾贊)씨였다. 그분은 강직한 분인데 군에서 지내본 바로는 윤씨가 적십자사 총재로 적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총재를 선출하지 못한 채 한 달 가량이 지나갔다. 나는 다시 오종식씨를 찾아가 김성진 장관을 설득하겠으니 소개해 달라고 했다. 오 선생이 그 자리에서 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아침 오 선생의 장남인 오봉렬(吳鳳烈) 한적 구호국장을 대동하고 을지로에 있던 보사부의 장관실로 찾아갔다. 나는 "4·19가 일어나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적십자 총재를 잘 뽑아야 한다. 적십자 직원들이 최두선씨를 원하니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다. 8월이라 무척 더운 날씨였다. 한참동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김 장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최두선씨가 전원일치로 총재에 선출됐다. 최 총재는 1960년부터 72년까지 네 번 연임을 하며 한적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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