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포퍼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의 역사주의 전체론과 유토피아주의를 배격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이성과 비판적 합리주의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책임지는 '열린 사회'의 적이기 때문이다.열린 사회는 점진적이며 진화적 발전을 지향하는 영국의 페비안(Fabian)과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 전통 이념과 부합한다. 그러나 '현명한 자가 이끌고 통치하며 무지한 자는 따라야 하는' 플라톤의 엘리트 국가주의를 거부한다.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와는 애초부터 융합할 수 없다.
20세기 말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냉전이념이 붕괴한 후 포퍼 철학은 세계적으로는 초국가 권력에 대항하고 한 나라에서는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열린 사회에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잘못을 발견하여 조화하고, 감정과 정열에 호소하기보다 이성과 경험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한 손에 '자유 민주 그리고 평화의 깃발', 다른 손에 '총과 핵'을 들고 세계를 지배한다. 나라별로는 자유와 민주화 수준에 따라 군사 지식 언론(정보) 경제 전통 등의 권력이 여러 모습으로 지배한다. 위대한 민족이나 지도자, 계급, 때로는 광기의 이념지배 유혹 때문에 다원주의와 이성에 기초하는 자유주의 사상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예컨대 지금의 미국은 무자비한 19세기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자유와 민주의 기치를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 해외에 725개의 군사기지를 두고, 조지 워싱턴이 우려한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펜타곤과 CIA가 세계지배 권력을 행사한다.
수많은 분쟁지역과 이라크처럼 미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나라에 대한 일방적 공격은, 아랍 민족의 이해와는 물론 '열린 사회'의 이상과도 충돌한다. 구 제국주의 식민지배 하에서 줄기차게 저항했던 독립운동 형의 게릴라식 테러전이 그 예다. 탈레반과 아랍권이야말로 초강대국인 미국의 세계지배 권력해체를 요구하는 용감한 세력인 셈이다.
그리고 미국 스스로는 거대 군사프로젝트에 자원이 집중되어 민생경제를 외면하고 인류복지증진을 거역한다. 이것이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이 말하는 '제국의 슬픔'이다. 그래서 테러는 미국식으로 '싸워서 뿌리뽑아야 할 문제'이기보다 유럽식으로 '관리해야 할 위협'으로 대응하는 것이 열린 사회의 지혜이다.
우리 한국은 지금, 5·16 군사쿠데타 이후의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시민운동과 인터넷 속의 익명의 다원적 의지가 폭발한다. 권위주의 정치권력은 물론 여론지배 집단이었던 오프라인 언론과 지식권력은 빠르게 주변부로 미끄러지고 있다. 개발세력이었던 노년층은 물론 민주화와 함께 여론층으로 부상했던 시민운동가조차 사이버권력에 등을 떠밀리고 있다. 이른바 구 권력해체를 통한 새 권력구축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2002년 월드컵과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 항의 촛불시위로 구축된 민중권력은 대통령 탄핵정국 이후 불법이라는 유권해석도 수용하지 않고 법권위마저 위협한다.
이 모두 세계적 흐름인 '구 권력해체와 새로운 열린 사회에 대한 지향'일 수 있다. 그것이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의 상실과 비판적 합리주의의 약화로 인해 역사진보의 역동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초강대국 미국이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국방과 정보라인으로 이동시킨 권력을 국민의 대의기구인 의회로 다시 환원시키기를 바란다. 독립운동형 게릴라전은 관리해야 할 위협이지 때려 부수어야 하는 악의 뿌리는 아니다.
우리를 비롯한 세계는 이성과 비판적 합리주의가 보편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고,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발전을 지향하는 '열린 사회'시대정신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권력해체 시대의 역동성 회복의 대안이기 때문이다.
전 철 환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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