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스 드 발 지음·황상익, 장대익 옮김 바다 발행·1만8,000원
멜로영화 '파이란'은 권력이동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주인공 강재(최민식)는 뒷골목 동기 용식(손병호)과 함께 건달 세계에 뛰어든다. 야비하고 주도면밀한 용식은 조직 보스가 되고 우유부단한 강재는 용식 밑에서 일하게 된다. 조직 내 영향력이 점차 떨어지면서 강재는 후배들에게 치이고 "어이, 강재씨" 따위로 불리는 수모를 당한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파이란' 못지않은 빼어난 정치 드라마를 선사한다. 네덜란드 아넴 소재 부르거스 동물원 야외사육장에서 23마리의 침팬지를 6년 동안 관찰한 보고서인 이 책은 제인 구달 등의 동물행동학 연구를 풍부히 활용한 학술서적이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침팬지 한 마리 한 마리에 감정이입을 하게 할 정도로 매혹적인 이야기 솜씨를 자랑한다. 우두머리 침팬지 이에론이 두 달 여의 권력투쟁 끝에 까마득한 후배인 루이트에게 굽신거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영화 '대부'의 침팬지 버전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침팬지는 현실적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다. 권력 지향엔 예외가 없지만, 그들의 정치성은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지도 않으며, 폭넓은 지지 없이는 우두머리에 오를 수도 없다. 각 소집단 사이의 경쟁과 동료애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분 상승도, 동료들에게 대접 받기도 어렵다.
굽신거리기, 털 골라주기, 키스하기 등 복잡한 교류 방식도 터득해야 한다. 집단 내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동시에 도모하는 합리적인 행동 원칙이 침팬지 폴리틱스의 제1 원칙이다. 합종연횡과 이합집산, 화해와 투쟁의 병행, 중재를 통한 대립 해소, 연기와 위장을 통한 갈등 회피는 인간의 정치적 행태를 돌아보게 만든다.
부제가 '권력투쟁의 동물적 기원'인 이 책은 인간의 정치투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능적이며 다양한 전술을 활용하는 침팬지의 권력투쟁과 사회생활을 다뤘다.
그러나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인간 못지않은 정치적 동물이 있다'는 겸손한 자각이 아니다. 토마스 홉스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는 끝없고 쉼없는 인간의 권력욕"을 환기시킨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침팬지 사회를 보면서 우리는 저자의 말대로 "자신의 행위를 성찰할"계기를 얻는 것이다.
저자 프란스 드 발(56)은 네덜란드 태생으로 미국 에모리대 영장류행동학 교수이다. 번역은 1982년 초판에 사진과 각주를 보강한 98년판을 대본으로 했다. 98년판 에필로그에 따르면 이에론은 동료 니키와 손잡고 루이트의 고환을 잘라버리며 피의 복수를 감행했다. 그뒤 이에론은 후배 댄디와 연대해 포악한 니키를 추방했고, 겁에 질린 니키는 '자살'로 보이는 익사로 생을 마감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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