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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9> 韓赤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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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9> 韓赤에 들어가다

입력
2004.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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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3년 3월16일 대한적십자사에 들어갔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학도호국단 외에는 학생 활동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한적은 국제 조직인데다,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 캐나다 등 외국의 청소년적십자(RCY) 단원들이 학우들에게 보내는 조건으로 구호용품 성격의 선물을 많이 보내와 이를 받기 위해서도 청소년 조직이 필요했다.이 대통령으로부터 청소년적십자 창설에 대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그 문서를 기안했다. 3월 말에 건의해 승인이 났다. 내가 청소년부장 서리 국장으로 한 첫 행사는 학생대표 200명을 데리고 부산 송도 뒷산에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은 것이었다. 지난해에 당시 청소년적십자 대표들도 함께 부산에 가서 창립 50주년 기념 식수를 했다. 나의 발상으로 한 일을 50년이 지나 총재로 기념하니 감개와 감사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약 3개월간 각 여학교 학생 50∼60명을 동원해 대청동의 한 사찰을 빌린 적십자 강당에서 부산시내 5개 임시 국군병원에 수용된 상의 군인을 위한 가운과 세면도구주머니 등을 만들었다.

나는 학교를 돌아다니며 아침 조례시간에 10∼20분간 적십자사에 대해 강연하면서 청소년적십자 조직 작업을 해나갔다. 대통령이 허락한 일이라 학교들이 선선히 조례시간을 내줬다. 부산 동주여상에서 처음으로, 남창여고에서 그 다음으로 청소년적십자를 결성했다.

여름 방학인 8월에 중·고교 학생 대표 200명을 뽑아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일주일간 합숙하며 리더십 훈련을 했다.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했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잘 치러냈다. 시인 모윤숙(毛允淑), 정대위(鄭大爲) 한신대교수, 훗날 상공부 장관을 지낸 김영선(金永善), 국회부의장을 한 황성수(黃聖秀)씨 등이 강사로 왔다. 그 때 간부훈련을 받은 학생 가운데 러시아 대사를 지낸 이인호(李仁浩) 박사, 언론인이었다가 한적 부총재를 지낸 봉두완(奉斗玩)시, 당시 전국 중고등학생연합회장이었던 정호용(鄭鎬湧) 전 한진건설 사장 등이 있었다.

10월에 서울로 돌아와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등에 청소년적십자를 조직해나갔다. 청소년 적십자단원들은 연극반을 만들어 일선 장병과 수복지구 청소년들을 위문하고 농촌 봉사, 식수 봉사 등을 했다. 국제적십자연맹과 공동 주최로 국제청소년미술전시회를 덕수궁에서 열기도 했다.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돼 대만을 선택하고 후송되는 포로들에게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용산역에 나가 위문품을 나눠 주기도 했다.

53년 입사 당시 한적 본사 직원은 15명 정도였다. 총재인 구영숙(具永淑)씨는 미국에서 공부한 소아과 의학박사로 이승만 박사가 환국했을 때 이화장을 거처로 제공했던 분이었다. 이 대통령은 내가 들어간 지 10개월도 안돼 구 총재의 사표를 받았다. 그 때 부산 국제시장에 큰 화재가 났는데 미국 적십자사 구호부 차장 사뮤앨 크라코가 2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가져왔다. 그는 누구에게서 무슨 정보를 받았는지 구 총재가 미국이 전에 보낸 구호품을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오해를 했다. 크라코가 이 대통령한테 가서 구 총재를 그대로 두면 구호금을 안 주겠다고 하니, 이 대통령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구 총재의 사표를 받았다. 해명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때는 어떤 자리든 이 대통령이 '당신 그만 둬' 하면 그만 둬야 하는 때였다.

그 다음에 총재로 온 이가 이 대통령 주치의인 손창환(孫昌煥) 박사였다. 사무총장에는 이화여대 체육과장으로 있던 김신실(金信實) 선생이 왔는데 영어를 잘하고 심성이 깨끗한 분이었다. 두분 모두 명예 총재인 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한적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 54년 4월29일 나는 한적 강당에서 나보다 먼저 들어와 총재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던 어귀선(魚貴善)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초창기에는 한적 창립 기념식에 이 대통령이 직접 왔다. 회비는 각 도지사가 경쟁해 거둬주었고, 1등을 한 도지사에게는 이 대통령이 우승기를 주었다. 한적과 정부간 협력관계가 그만큼 긴밀했다. 월급은 적었지만 한적 직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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