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많든 적든, 연주할 곡의 편성이 크건 작건 상관없이 늘 대규모 단원을 거느리면서 인건비 부담에 허덕이며 비틀거리는 공룡 신세.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들 대부분이 그렇다. 정작 공연 제작비로 쓸 돈은 없고, 본격적인 기획이나 홍보는 꿈도 못 꾼다. 그러다 보니 맨날 모여서 연습은 하는데, 공연의 질은 만족스럽지 못하고 객석은 썰렁하다. 이 악순환을 벗어날 돌파구는 없을까.젊은 지휘자 박영민(39)이 그 대안을 찾아 나섰다. 국내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오케스트라 실험을 시작한 것. 고정단원 없이 기획 중심으로 움직이는 서울 클래시컬 플레이어스(SCP)를 창단, 13일 저녁 8시 호암아트홀에서 창단연주회를 한다. 로저 노링턴의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스'를 모범으로 삼은, 일종의 길드(동업자 조합)형 오케스트라다.
고정단원은 없지만 공연에 맞춰 급조되는 뜨내기 악단은 결코 아니다. 수준급 연주자들로 70∼100여 명의 인력 풀을 유지하면서 공연에 따라 단원 구성을 달리 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SCP는 13명의 정예 수석그룹을 확보하고, 오디션을 거쳐 20여 명의 핵심단원을 뽑았다. 이들은 6개월 단위로 계약, 각자 개인일정에 맞춰 하고 싶은 연주에 참여한다. 그렇게 해서 좋은 앙상블이 가능할까. 박영민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연습을 통해 일치된 앙상블과 악단 특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6개월 전에 연주자들에게 공연 일정과 곡목을 알리고, 수석들에게는 미리 악보를 보냅니다. 우선 수석끼리 만나 연습을 한 뒤 파트별 연습을 거쳐 전체 리허설을 합니다. 단원들이 매일 얼굴을 맞대고 연습해야 잘 할 수 있는 거라면, 우리나라에서 진작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나왔어야죠."
유연한 조직으로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점 외에 SCP의 가장 큰 특징은 기획의 강화이다. 기획과 홍보, 마케팅을 전담할 팀으로 공연기획사 '스테이지 원'과 계약을 했다. 전속편곡가와 전속작곡가를 두기로 한 것도 남다르다. 국내 몇 안 되는 오케스트라 편곡자 중 한명인 김영아와도 계약했다. 전속작곡가 제도는 이르면 내년 초부터 할 계획이다. "유럽의 오케스트라는 국가나 방송국이 운영하는 몇몇 개 말고는 대부분 SCP와 같은 형태입니다. 유명한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잉글리시 체임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케스트라 강국인 핀란드에서도 시립 오케스트라의 고정 인원은 수석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엔진만 갖고 자동차를 말할 수 없듯 오케스트라도 단원과 지휘자만 갖고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전문적인 기획과 효율적 운영이 필수적이죠."
그는 오스트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997년부터 5년 6개월 간 원주시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교향악단의 문제점과 한계를 체감했다. SCP의 창단은 그런 고민을 해결해보려는 의욕적 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창단 연주회는 'The Fifth 2004'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연주곡은 모두 베토벤의 작품으로 교향곡 5번 '운명'과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피아노 강충모), 그리고 '길레르트 시에 붙인 6개의 가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연주한다.
SCP가 한국 오케스트라의 고질병을 고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번 연주는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02)780―5054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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