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1920∼1976)의 작품전이 2일부터 5월 1일까지 가나아트갤러리가 서울 평창동에 새로 개관한 가나아트·포럼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사후 추모전과 유작전, 판화전 등이 서너 차례 열린 적은 있지만 그의 대표적 회화와 판화는 물론 태피스트리(tapestry), 드로잉, 신문연재소설 삽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7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은 이번 전시는 우향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다.우향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과 부부 화가로, 각자의 아호 첫 글자를 딴 '운향(雲鄕)'이라는 한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다. 하지만 우향은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동양과 서양의 미학을 아우르는 독창적 조형성을 개척한 대표적 여성 작가였다. 운보가 그의 호처럼 구름 같이 변화무쌍한 예술세계를 펼쳤다면, 우향은 운보가 지어준 호처럼 고향마을에 촉촉이 내리는 비 같이 운보의 예술에 넓고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는 운보의 작품도 몇 점 출품돼 두 사람의 예술적 교감을 알 수 있게 한다.
우향의 독보성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한국화의 현대적 정체성을 확보하려 한 열정에 있다. 그는 일제 말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전통적 채색 한국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잇달아 입선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 인연으로 1943년 운보와 처음 만났고 3년 뒤 결혼했다. 한국 최초의 부부전이었던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을 시작으로 그들의 부부전은 이후 국내외에서 12차례나 열렸다.
하지만 우향은 50년대 말부터 동·서양 미학을 나누는 이분법과 장르에 제한 받지 않고 자신의 그림에 서구적 추상을 도입한다. 그는 한국 여성화단의 추상화 1세대 작가였다. 56년 작 '아이들'과 대지적 여성상과 이상향에의 희구를 그린 60년 작 '나녀' '풍요' 등은 그가 '동양화의 추상화(抽象化)'라고 이름 붙인 조형실험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60년대 중·후반에 전통 재료를 이용한 그의 추상작업은 만개했다. 한지의 특수성을 살려 물감을 번지게 하고, 흘려 내리고, 다른 한지를 구겨 거기에 물감을 묻혀 찍는 기법과, 꼼꼼한 붓질로 전래 민화에서 보이는 화려한 채색을 결합해서 다양한 형상을 창조한 그의 작업은 점차 구상적 요소가 사라지는 순수 추상으로 나아갔다. '작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세포 조직을 연상시키는 '작품' 시리즈에 대해 우향은 그 형태가 "엽전 꾸러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엽전 혹은 맷방석에서 나왔다면, 황색이 주조인 색채는 "격동적 시대 조류에 맞춘 것"이었다. 고유의 사물과 색채, 그리고 여백으로 작가의 정신세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곧 문인화 전통과 닿아있다.
60년대 중반의 해외여행과 60년대 말 이후 6년간의 미국 유학에서 우향은 판화와 태피스트리라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깊고 절실하게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 예술이라는 말과 곧잘 상반되는 단어로 쓰이는 기술이라는 것이 작가의 예술성을 깊게 해줄 뿐더러 표현방법에 의의와 확대를 가져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달과 태양, 바람, 나무, 나이테 등을 우향은 "태초의 씨앗들"이라 부르며 다색판화 작업으로 표현했다.
전시에는 우향 특유의 꼼꼼함을 보여주는 태피스트리 작업과 치밀하고도 따뜻한 필치의 65∼66년 신문연재소설 삽화도 함께 출품됐다. 가나아트·포럼스페이스가 개관기념으로 여는 '한국 미술의 힘' 시리즈 첫번째 전시다. 문의 (02)720―1020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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