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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금기는 없다

입력
2004.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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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사랑한다 말해줘'에는 낯 뜨거운 장면이 수시로 등장한다. 이나(염정아)는 만취한 자신을 집에 데려다 준 숫총각 병수(김래원)에게 강제로 진한 키스를 퍼붓고, 동정까지 빼앗는다. 1980년대 중반 작가 김수현씨가 "국내 드라마에는 키스 장면도 못 내보낸다"며 불평하곤 했고, 90년대 들어서야 키스 실연이 '해금'된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변화다.#KBS2 '백설공주'에는 영희(김정화)가 자취방에서 친구와 애인이 '일'을 치르고 간 뒤 콘돔을 발견하고 놀라는 장면이 나왔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안방극장, 그것도 10대 취향의 드라마에 콘돔이 버젓이 등장한 것은 '사건'이다.

TV 드라마가 전례 없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성애(性愛)의 표현 강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 사회적 금기(禁忌) 혹은 적어도 안방극장에서는 금기시됐던 소재까지 과감히 다룬다. 표현의 자유 확대가 대세이고 근친상간에까지 손을 뻗친 영화에 비하면 아직 제약이 많지만, 가족오락 매체인 TV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교복 멜로=원조 교제? NO!

2001년 40대 유부남과 20대 처녀의 사랑을 다룬 KBS2 '푸른안개'는 원조교제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여주인공 신우(이요원)는 20대 초반의 스포츠댄스 강사, 즉 성인이었다. 원조교제로 치면 최근 종영한 KBS2 '낭랑18세'의 고교생 정숙(한지혜)과 20대 후반 검사 혁준(이동건)의 교제가 더 가깝다. 불륜이 아니고 집안간 정혼이란 변명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불과 3년 사이에 교복 차림 여고생의 애정 행각이 비난은커녕 그 또래 딸을 둔 아줌마들의 환호까지 받은 것은 격세지감을 느낄만하다.

미혼모를 넘어 비혼모로

2003년 남녀평등 방송 대상을 받은 KBS1 '노란 손수건'의 주인공 자영(이태란)은 남자에게 차이고 홀로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자영은 '청춘의 덫'(SBS·1999년)의 윤희(심은하)처럼 배신남에게 "널 부숴버릴거야"라고 저주를 퍼붓기보다 아이까지 감싸안는 멋진 새 남자를 만나 당당하게 살아간다. 평생 '죄인'으로 살거나 복수에 일생을 바치는 미혼모의 얘기는 이제 옛 말이 됐다. 물론 여전히 남자의 이기심 혹은 호주제의 피해자로 그려지지만, 영화 '싱글즈'처럼 '자발적 비혼모(非婚母)'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이제는 맞바람이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불륜, 하지만 더 이상 남편과 미혼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부녀(황신혜)―유부남(유동근)의 그림 같은 사랑을 다룬 MBC '애인'(1996) 이래 아줌마들의 바람이 적잖이 다뤄졌고, '위기의 남자'(2002) '앞집여자'(2003) '천생연분'(2004)에서는 남편의 불륜에 맞선 아내의 '맞바람'이 전면에 등장했다. KBS2 '애정의 조건'(사진)에서도 금파(채시라)가 맞바람을 피우다 이혼하는 내용이 그려질 예정이다. 물론 "불륜은 생활의 비타민"이라고 외치던 '앞집여자'의 애경(변정수)도 '비타민'보다는 '쌀밥'을 택했듯이 대개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극적인 장치로 쓰인다. 하지만 맞바람의 자극 효과가 반감될 즈음, 영화 '바람난 가족'의 호정(문소리)처럼 홀로서기를 택하는 여성들이 늘지 않을까.

동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백설공주'의 영희는 짝사랑하는 남자의 동생 선우(이완)와 얼떨결에 함께 살다 새 사랑에 눈 뜨고, '애정의 조건'의 은파(한가인)는 철부지 바람둥이와의 동거로 심신이 모두 망가졌다. 철부지들의 불장난쯤으로 치부되던 동거가 이처럼 전면에 등장한 데는 MBC '옥탑방 고양이'(사진)의 대성공이 큰 몫을 했다. 과거에도 동거는 적잖이 등장했지만 대개는 비정상적이고 구질구질하게 그려졌다. 반면 '옥탑방…'은 비록 사회적 비판을 의식해 "살아보고 결혼하자"는 원작소설의 '소신 동거'를 돈에 얽힌 부득이한 선택으로 탈바꿈시켰지만, 코믹 발랄 코드를 가미해 동거에 덧씌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벗겨내는데 성공했다.

아직은 조심스런 동성애

SBS '완전한 사랑'(사진)에서 승조는 동성애자였다. 2000년 '커밍아웃' 이후 방송계에서 퇴출 당했던 홍석천이 동성애자 역할로 드라마에 복귀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작가 김수현씨나 홍석천이 강조했듯이 승조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여자의 속 깊은 고민을 받아주기에 더없이 좋은 친구로 그려졌다. 그동안 동성애는 MBC 베스트극장 '두 여자의 사랑'(1995), SBS '숙희 정희'(1997) 등 단막극에서 가끔 다뤄졌지만, 그러나 '숙희 정희'는 방송위의 경고를 받았고 시청자들의 거부감도 강했다.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드라마의 등장은 아직 멀었지만 '완전한 사랑'은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씻는 단초를 제공했다.

근친의 사랑, 어디까지 갈까

근친상간은 아마도 드라마 최후의 금기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상간(相姦)'까지는 아니어도, '근친의 사랑'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다뤄지고 있다. MBC '눈사람'은 처제(공효진)와 형부(조재현), KBS '진주목걸이'는 친남매(김민종·김유미)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다뤄 논란을 불렀다. 이밖에도 SBS '피아노'의 김하늘과 고수, MBC '남자의 향기'의 안재모와 한은정, SBS '천국의 계단'(사진)의 최지우와 신현준 등 피붙이는 아니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한 남매들의 비극적 사랑도 줄을 잇고 있다. 양질 전환의 법칙이랄까, 이런 근친들의 사랑이 수없이 되풀이되다 보면 마지막 금기를 건드릴 날도 오지 않을까.

표현의 자유? 아직은 절름발이

드라마 소재의 다양화는 우리 사회에 분명 존재하지만 내놓고 말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을 슬쩍 건드려줌으로써 따질 것은 따지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소재의 다양화나 표현의 강도 높이기가 유독 성과 사랑에 국한돼있는 점은 시청률 올리기의 방편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90년대 초반 봇물을 이뤘던 정치, 사회 드라마가 거의 자취를 감춘 것이 그 반증이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소재가 다양화했다지만 여전히 드라마는 재벌 얘기가 빠지지 않고 '혼사(婚事) 장애'나 사랑 타령에 머물고 있다"면서 " 'CSI수사대' 같은 법의학 드라마, 'X파일'류의 SF 드라마, 역사를 제대로 다룬 드라마는 왜 없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장르 면에서 추리나 다큐 드라마, 독백 또는 3인칭 시점 드라마 등 다양한 형식 실험이 이뤄질 때 표현의 자유 신장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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