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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벛꽃동산'으로 돌아오는 김호정/그녀가 무대에 서면 얼음은 불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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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벛꽃동산'으로 돌아오는 김호정/그녀가 무대에 서면 얼음은 불꽃이 된다

입력
2004.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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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 배우 김호정(36)은 얼음과 불을 동시에 지닌 사람 같다. 은은한 느낌이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그 느낌은 증발되고 냉정 안에 열정을 뿜어내는 배우만 남는다. 음식마다 케첩을 뿌려 먹는 속물스런 주부('첼로와 케첩'·2001년)일 때도, 일밖에 모르는 불쌍한 군인 남편 대신 군악대장의 품에 안기는 아내('보이체크'·2003년)일 때도 김호정은 없고, 그 여자들만 있었다. 과작(寡作)임에도 연극 '바다의 여인'으로 2000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 세번째 영화 '나비'로 2001년 로카르노영화제 여우주연상 등 상이 끊이지 않았다.그렇지만 최근 3년간 연극배우 김호정(36)의 이력은 몇 줄이 되지 않는다. 연극 두 편과 영화 한편이 전부다. 오랜 휴식을 털고 일어선 김호정이 체호프의 '벚꽃동산'으로 1∼11일 동국대학교 예술극장 무대에 선다. 최민식과 함께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도 찍고 있다.

체호프의 4대극 모두 하고 싶다

뜸해도 너무 뜸했다. '게으르다'는 게 김호정이 밝힌 이유다. "실컷 쉬었으니 올해는 바쁘게 보내겠다"고 한다. 동국대 선배인 연출가 전 훈이 집에 찾아와 함께 해달라는 부탁에 선뜻 응했다. 보수도 없다. 결혼도, 연기도, 돈에도 욕심이 없는 배우일까. 그저 올 한해 전 훈이 차례로 올리는 체호프의 4대 희곡'벚꽃동산' '바냐 아저씨' '갈매기' '세자매'에 좋은 배우들이 함께 했으면 바랄 뿐이다. "대학 졸업작품도 '세 자매'일 정도로 체호프를 좋아해요. 또 언제 체호프를 해보겠어요."

'벚꽃동산'에서 그녀는 몰락한 지주 가문의 양녀 바랴로 나온다. 수녀가 되고 싶기도 하고, 벚꽃동산을 별장으로 바꿔 돈을 벌려는 농노 출신 상인 로파힌과 결혼하고 싶기도 하다. 300만평에 달하는 벚꽃동산이 경매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는 엄마와 외삼촌과 달리 바랴는 현실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현실주의자이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좌절한다."함께 영화를 찍고 있는 최민식씨가 '호정이가 주인공이니 꼭 보러 가겠다'고 했는데 '난 주인공이 아냐'라고 했어요. 너무 다들 잘해서 밀려났다고."

조민기 예수정 등 출연진이 화려하다는 얘기도 되고, 체호프 특유의 극 성격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체호프의 매력은 모두가 주인공이란 거예요. 장렬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모든 역이 살아있어요. 그래서 어렵기도 하구요."

달리 할 일 없는 진짜 배우

체호프에 대한 예찬은 계속된다. "실연 했을 때인데 '갈매기' 수업을 듣다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어요. 이런 게 삶이구나. 등장 인물은 악한 사람이 없고, 모두 보듬고 싶은 인물들이에요. 돈 못 벌어도 체호프를 하고 싶어요."

시골 학교 선생님의 예술적 열정을 다룬 새영화'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는 최민식의 헤어진 애인 역을 맡았다. "게임 끝났어요. 오빠는 연기를 너무 잘 하니까"라는 말로 영화를 요약한다. "연극에서 식모 취급 받다가 영화에서 공주 대접 받는 게 좋기는 하지만"스크린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아직 어색하다. 데뷔작'침향'(1999년)에 이은 두번째 영화'플란다스의 개'(2000년) 시사회 때는 끝나자 마자 도망쳐 나온 기억이 있다.

'자동차도 없고, 길을 걸어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지금의 삶을 그녀는 충분히 즐기는 듯했다. 다음 작품이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스스로를 타이른다. 많은 작품을 할 경우엔 부끄러운 연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김갑수 오빠가 10여년 전 '어디 나가서 배우입네 하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몇 년 전 "이제 배우라고 해도 되죠?"라고 물으니 돌아온 답은 "달리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니"였다. '천생 배우일 밖에 없는' 후배에 대한 우회적 찬사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온통 검은 천을 휘감고 연습실에 들어선 김호정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그녀가 19세기 러시아 벚꽃동산으로 성큼 들어서자 칙칙하고 냉랭한 지하실이 금세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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