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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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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가 개봉된 때는 1993년입니다. 10년이 더 됐죠.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어있던 시절이었던지,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소리꾼 유봉(김명곤)이 의붓딸 송화(오정해), 아들 봉호와 함께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그 화면의 배경이 된 돌담길이 완도군의 끄트머리 섬인 청산도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번 꼭 가봐야지.' 마음 한 구석에 10년이 넘도록 그 영상을 간직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꿈을 이루었습니다.

잘 만든 영상물이 여행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보기 위해 동남아와 중국, 일본 등에서 관광객이 밀려드는 '한류 여행'은 대표적 예입니다. 그래서 요즘 지방자치단체는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팀을 유치하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그 노력이 무모할 정도여서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완도군도 곧 촬영에 들어가게 될 KBS 사극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전남도와 함께 50억원 규모의 세트장을 지을 예정입니다.

사실 '한류 여행'이나 '영상 여행'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관광 인프라 구축을 게을리하고 영상물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청산도 여행을 계기로 생각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100실 규모의 숙박시설을 짓는다면 10년에 넉넉잡아 7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만든 영상물 하나는 수백만명 혹은 수천만명의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숙박시설은 10년이 넘으면 다시 짓거나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영상에 대한 기억은 지속됩니다. 수백만, 수천만명이 '한 번 가 보고싶은 곳'으로 꼽는 것 만큼 강력한 관광 인프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청산도 돌담길 입구에 가만히 서서 5분40초 동안 롱테이크 기법으로 인상적 화면을 만든 카메라처럼 돌담길을 응시했습니다. 푸른 보리밭에 얼굴을 들이대고 향기로운 봄의 흙냄새도 맡았습니다. 돌담길을 걸으며 '진도아리랑'을 흥얼거리고 덩실덩실 어깨춤도 추었습니다. 북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며 박자를 맞췄습니다. 10년이 넘도록 품었던 작은 욕망을 해결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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