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의 봄은 얼마나 익었을까? 서울 거리의 가로수가 마구 잎을 틔우는 모습을 보면서 봄이 일찍 시작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봄의 한가운데를 맛 볼 요량이었다. 과연 그랬다. 익을대로 익어 눈이 아프도록 푸른 봄이 그 곳에 있었다.청산도(전남 완도군)는 생경한 섬이 아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촬영된 무대다. 영화 속 주인공 셋이 소리를 하며 걷는 돌담길이 이 섬에 있다. 어떻게 이 남쪽의 끄트머리까지 와서 촬영할 생각을 했을까. 예로부터 이 지역을 '청산여수(靑山麗水)'라고 했다. 산과 물이 아름답다는 의미다. 청산은 그대로 섬 이름이 됐고, 여수는 도시 이름이 됐다. 서편제의 소리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임 감독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 곳을 찾은 이유다.
과거 청산도는 아름답지만 가난한 섬이었다.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서되를 채 못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비탈이 심해 논을 만들기가 힘들었다. 흙을 파낸 후 돌을 깔았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어 논을 만들었다. 이 곳에서는 '구들장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섬과 가까운 바다는 대부분 양식장이다. 활어, 김, 미역, 톳 등을 비롯해 요즘은 전복까지 양식을 한다. 부자 섬이다. '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옛말이 있다. 청산도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후한 인심까지 맛볼 수 있는 섬이다.
청산도 여행의 첫 순서는 바닷가이다. 섬에는 이름 높은 해수욕장이 2곳 있다. 주민들이 가장 자랑하는 곳은 지리해수욕장이다. 섬의 관문인 도청항에서 가깝다. 밀가루처럼 고운 은빛 모래가 깔려있다. 아이들이 아무리 거칠게 뛰어다녀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다. 1.2㎞의 은빛 해안을 따라 수령 200년이 넘은 곰솔 8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여름에 햇살을 피하기에 좋다. 지리해수욕장은 섬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일몰을 볼 수 있다. 하늘과 바다는 물론 물기를 머금은 모래까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다.
지리해수욕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주는 신흥해수욕장은 섬의 동쪽에 있다. 해변은 돌로 덮여있다. 크고 투박한 돌이 아니라 동글동글한 갯돌이다. 파도를 맞는 곳의 돌은 물에 마모돼 계란 크기만 하고, 먼 곳의 돌은 호박만 하다. 모래가 없어 해수욕 이후 털 필요가 없다. 돌들은 햇살을 받으면 뜨거워진다. 돌 위에 누우면 맥반석 사우나가 따로 없다.
바다를 돌면 산으로 오른다. 청산도에는 3개의 봉우리가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매봉산으로 해발 384m이다. 이 산 기슭에 범바위라고 불리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바닷가 절벽 옆으로 우뚝 솟은 이 바위에 오르면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이웃의 소모도와 대모도, 서쪽으로 소안도와 노화도, 북쪽으로 신지도 등이 눈에 들어온다. 발 바로 아래에 작은 섬이 있다. 섬으로 향한 절벽에 분홍색 진달래가 꽃을 피웠다. 분홍 진달래를 배경으로 파란 파도를 맞는 돌섬의 모습. 꿈결 같다.
청산도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서편제'의 돌담길이다. 청산도의 길은 대부분 돌담길이다. 제주 만큼 돌이 많고 바람도 많아 돌을 쌓아 집과 논밭을 보호했다. 가장 운치있는 길은 영화에 등장했던 곳이다. 도청항에서 멀지 않은 당리의 야트막한 야산에 난 길이다. 영화를 찍을 당시에야 이 길이 '명물'이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완도군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됐다. 마을에서 유채꽃도 심고, 촬영 당시 카메라가 있었던 곳에 전망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놓았다.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어본다.
돌담 안의 색깔이 예사롭지 않다. 마늘과 밀과 보리가 가득하다. 마늘은 굵기가 어린 아이 손목 만하게 훌쩍 자랐고, 밀은 벌써 고슴도치 같은 이삭을 피웠다. 보리의 빛은 섬 이름 그대로 '청산'을 일구어 놓았다. 청산도의 봄은 이미 떠날 채비를 챙기고 있다. 그래서 나그네는 오히려 야속하게 느껴진다.
/청산도(완도)=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호남고속도로 광산IC에서 빠져 13번 국도를 이용, 나주-영암-해남을 지나면 완도대교에 닿는다. 완도항은 대교의 반대편에 있다. 역시 13번 국도를 타고 섬의 동쪽을 돌면 완도항에 도착한다. 청산농협(061-552-9389)에서 운영하는 청산페리호가 완도항과 도청항을 하루 4차례 왕복 운항한다. 45분 걸린다. 차를 실을 수 있는 배다. 섬에서는 도청항과 당리-읍리-청계리-신흥해수욕장을 잇는 청산여객(552-8546) 버스가 하루 8차례 운행한다. 청산택시(061-552-8519)는 모두 4륜 구동차이다. 정액제로 2만원 정도면 섬의 어디든 갈 수 있다.
숙박시설이 그리 많지 않다. 배가 닿는 도청항에 등대모텔(061-552-8558)이 있다. 객실이 7개 뿐이어서 주말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 지리해수욕장 인근에 청산민박(552-8800) 제일민박(552-8807) 등이 있고 읍리에 읍리민박(552-8841) 우리민박(554-8251) 등이 있다. 숙박을 완도항에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완도항에는 숙박시설이 많다. 부둣가를 따라 장급 여관이 밀집해 있다.
꼭 맛을 봐야 할 것은 전복이다. 완도군 대부분의 섬에서 전복을 양식한다. 생명력이 좋은 전복은 별다른 약품을 투여하지 않아도 병이 없고 미역이나 다시마 등 천연 먹이만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자연산과 양식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기른 지 3년이면 출하를 시작하는데 6∼7년 짜리는 큰 만큼 값이 비싸다. 1kg에 5만∼10만원. 전복은 구이, 내장볶음(사진 아래부터), 죽, 회 등 요리법이 다양하고 요리에 따라 맛이 다르다. 섬의 대부분 식당에서 전복을 먹을 수 있다. 바다식당(061-552-1502) 자연식당(552-8863) 부두횟집(552-8547) 등의 음식점이 있다.
■완도 해상국립공원
완도군은 본섬을 포함해 201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이다. '청산여수'라고 했듯이 대부분의 지역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권에서 볼 때 먼 길이다. 큰 마음 먹고 나섰다면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둘러보자.
소안도 바로 옆 섬인 보길도의 유명세에 가려 관광지로서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보길도 못지않은 풍광과 내력을 지닌 섬이다. 물과 바람이 좋아 100세의 장수를 누릴 수 있는 곳,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의 소안(所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날부터 진도는 문신, 완도는 무신의 유배지였다. 그래서 진도의 문화가 섬세하다면 완도의 분위기는 역동적이다. 소안도는 완도군에서도 특히 그런 분위기가 짙은 섬이다. 일제시대에 이 섬은 남쪽 지역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다. 송내호 선생을 비롯한 항일 유공자가 19명에 이른다. 마을회관에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을 세워 놓았다.
미라리 해변이 이 섬의 자랑이다. 약 1㎞의 이 해변은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美) 아름답다(羅). 각 곳의 절경에 이름을 붙여 미라 8경이라고 부른다. 천연기념물 제339호로 지정되어 잇는 상록수림이 해변을 따라 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숲에 목신(木神)이 있다고 믿어 정성을 들여 관리해왔다. 섬의 반대편에 비슷한 상록수림이 또 있다. 역시 천연기념물(제3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안도는 완도항여객터미널(061-552-0116)과 화흥포항(555-1010)에서 배가 왕복한다.
보길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다. 고산 윤선도가 잠시 들렀다가 아예 눌러 살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다.
먼저 볼 것은 윤선도의 유적이다. 세연정, 동천석실 등이 유명하다. 세연정은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 옆에 세워진 정자. 굵은 소나무와 어우러져 우아한 분위기를 뽐낸다. 세연정 맞은 편 호숫가에 동백나무가 많다. 요즘 동백꽃이 떨어져 나무 밑은 붉은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다.
동천석실은 산 중턱에 만들어놓은 공붓방이다. 짙은 상록수림을 따라 난 길을 약 20분 오르면 나타난다. 딱 한 명이 들어가면 적당할 정도의 공간으로 창 밖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좋다.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은 곳이다. 보길도에는 모두 세 곳의 해수욕장이 있다. 그 중 예송리가 가장 아름답다. 이 해변은 까만 갯돌해변이다. 주민들은 '깻돌'이라고 부른다. 관광객이 돌을 많이 가져가 이제는 주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한다. 돌해변과 마을 사이에 상록수림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이다. 가장 많은 수종은 역시 동백이다. 숲이 온통 붉은 색으로 보인다.
완도 화흥포에서 소안도를 경유해 보길도로 향하는 배가 하루 15회 왕복한다.
당사도 원래 이름은 항문(港門)도 였다. 완도군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으로 항구(완도항)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의미이다. 어감이 이상해 이름을 바꿨는데 하필이면 자지(者只)도로 바꾸었다. 역시 어감이 좋지 않아 1982년 지금의 이름인 당사도가 됐다. 옛날 당나라와 무역을 할 때 이 섬에 내려 무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자그마한 돌섬으로 30여 가구에 50여 명의 주민이 산다. 영화 '그섬에 가고 싶다'의 촬영지인 이 섬에는 남도 뱃길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는 당사도 등대가 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깎아지른 벼랑 위에 우뚝 서 있다. 등대를 제대로 보려면 배를 빌려타고 바닷가에서 바라봐야 한다. 완도군은 당사도 등대 감상을 포함한 완도의 무인도여행(가칭) 프로그램을 만들어 곧 시행할 예정이다. 소안도에서 새마을호 배가 하루 두 차례 왕복한다.
난대수목원 1991년에 조성된 국내 유일의 난대수목원이다. 완도 본섬 군외면 대문리에 있다. 거의 산 전체가 수목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백나무를 비롯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황칠나무 등 난대성 상록수와 난초 등 709종이 있다. 산에 오르는 기분으로 산책로를 따라가면 한여름의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연중무휴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4월부터 6시)까지 개방한다. 육지에서 완도대교를 타고 완도에 들자마자 우회전, 3㎞를 달리면 간판이 보인다. (061)552-1544.
화흥포 완도 여행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화흥포는 완도군내의 크고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 최근 이 항구는 다른 이유로 타지 사람들에게도 유명해졌다. 일몰이 아름답다. 해는 섬이 아닌 바다로 바로 진다. 일몰로는 드물게 바닷물의 반사로 인한 오메가(괻) 현상이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 앞바다에 가득한 양식장에 떠 있는 작은 어선을 배경으로 한 일몰은 환상적이다. 12월31일 일몰을 보며 한 해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항구를 가득 메웠다.
/완도=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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