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고구려의 계승관계는 고구려사의 귀속을 결정하는 중요한 논거의 하나이다. 쑨진지(孫進己)를 비롯한 중국학자들은 고려와 고구려는 본래 족속(族屬)도 다르고, 귀속(歸屬)도 다른 국가여서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고려는 조선 역사에 나타나는 국가로 오늘날 조선족의 조상이 세웠고,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의 국가로 오늘날 중국 동북지역 일부 족속의 조상이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부터 이 둘을 모두 '고려'라고 불러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로 잘못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중국학자들은 두 나라의 계승관계를 부정하는 주요 근거로 고려가 건국한 지역과 족속의 성분을 들고 있다. 고려가 건국한 개성은 본래 백제 땅이었고, 나중에 고구려가 점령했지만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에 귀속됐으므로 고려는 신라의 옛 땅에 건국한 국가라는 것이다. 또 고려의 민족성분은 신라인과 백제인이 중심이고, 일부 고구려인과 한인(漢人)의 후예가 섞였다고 한다. 그리고 왕씨는 낙랑의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하지 않았고, 그 주민도 고구려인이 위주가 아니므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라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역사는 삼한에서 신라와 백제를 거쳐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송사' 고구려사 끝에 고려 건국 명시
고려와 고구려의 계승관계는 한국사 전체 체계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 역사책에서 고구려는 외국으로 간주돼 외이(外夷) 열전에 수록됐다. 중국의 사가들은 고려와 고구려를 동일하게 여겼다. '송사(宋史)' 고려 열전 첫머리에서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한다'고 하여 고려와 고구려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구려 역사의 끝 부분에 고려 건국에 대해 서술했다. 이런 대목은 당시 사람들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역사인식의 표현이다.
1123년 고려에 왔다간 송나라 문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역사를 기자에서 위만으로, 이어 주몽을 거쳐 발해로 체계화하고 고구려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 역시 당대 사람들이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인식했다는 증거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데서 가장 먼저,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다. 왕건이 국호를 태봉(泰封)에서 고려로 바꾼 것은, 새 국가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이전의 국호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그 나라를 계승하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건국 도읍인 개성은 본래 고구려의 부소압(扶蘇岬)이었는데, 삼국통일 후 신라에 편입되어 송악군(松嶽郡)이 됐다. 그러므로 고려는 통일신라의 영토에서 건국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옛 땅에서 세운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려가 신라 땅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아 북진정책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 것은 건국 직후부터 추진한 북진정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북진정책의 목표가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음은 "우리 태조께서 즉위한 후에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국경 지역을 돌아보신 뜻은 동명왕(東明王)의 옛 땅을 석권하려 한 데 있었다"는 충선왕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북진정책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인식의 표현이다.
평양은 북진정책의 전초기지였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큼 역사적 상징적 의미가 큰 지역이었다. 이 점을 알았던 왕건은 즉위 직후 황폐한 이 고을을 서경(西京)으로 삼았고, 훈요십조에서는 고려 '지맥의 근본'이자 '대업을 만대 동안 이어갈 땅'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서경은 고려 내내 개경과 함께 양경(兩京)으로 중시됐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도읍지를 수도의 하나로 삼아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왕건과 고려 주민은 고구려 후손
고려의 건국 이야기를 담은 '고려세계(高麗世系)'는 왕건의 출신과 관련해 그의 조상이 북쪽에서 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설화적 성격이 강하지만, 왕건의 조상 호경(虎景)이 백두산에서 노닐며 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 계곡에 자리 잡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왕건이 '발해는 나의 혼인(昏姻)'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도경'에는 '왕씨의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大族)이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왕건의 조상은 고구려 혹은 발해와 관련이 있다. 왕건이 낙랑군의 후예라거나 신라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고려 건국 주체세력과 개국공신을 분석해보면 패서(浿西)지역 출신이 많다. 예성강에서 대동강에 이르는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역, 즉 옛 고구려 지역 세력이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개성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에는 옛 고구려 주민들이 거주했고, 그들은 여전히 '고려인'으로 불리며 고구려 지향적인 토착의식을 갖고 있었다.
고려인은 고구려 계승 의식 뚜렷
고려 사람들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여겼다. 그러한 의식은 거란 장군 소손녕과 담판 벌인 것으로 유명한 서희(徐熙)에게서 잘 나타난다. 성종 12년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한 소손녕은 고구려의 땅을 이제 요가 다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땅에서 일어난 고려가 그 영토를 침식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반격했다. 또 고구려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의 동경(東京)이 그 안에 있어 도리어 요가 고려의 영토를 침식하는 것이라고 따졌다.
두 나라 모두 고구려의 고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요는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을 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고려는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선언은 당시 고려인들의 고구려관, 고구려 계승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함께 우리 역사의 일부임을 명백히 했고, 이규보는 동명왕의 일을 시로 지어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이규보에게 동명왕은 우리의 성인이었고, 고구려는 우리의 나라였다. 고구려 계승의식은 서경에 동명왕의 묘(廟)와 사당을, 개경에 동명왕의 어머니 하백녀(河伯女)의 동신사(東神祠)를 두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 데서도 볼 수 있다. 동명왕은 국가 차원에서 늘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누가 남의 조상에게 그토록 정기적이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겠는가?
마지막으로 고려는 고구려의 문화를 여러 면에서 계승했다. 왕릉과 대형 석실분의 벽면과 천정에 벽화를 그리는 전통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좋은 사례의 하나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고구려와 고려의 관계에 대한 중국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사실의 측면이나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근거가 없는 억지이다.
안 병 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옛 고구려는 고려 땅" 서희의 일갈에 거란 80만 대군 퇴각
거란의 소손녕은 993년(성종 12년)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했다. 서희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북계(北界)에 주둔했다. 소손녕의 군대 규모와 협박에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 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서희는 반대했고,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소손녕의 진영에 가서 담판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상견(相見)하는 예(禮)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여 끝내 소손녕과 뜰에서 서로 인사하고 당(堂)에 올라가 예를 행한 후에 동서(東西)로 마주 앉았다. 서로 대등한 위치를 확보한 것이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했다.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가 침식(侵蝕)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기는 까닭에 오늘 출병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베어서 바치고 조빙(朝聘·제후가 천자에 배알하는 것)하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듣고 서희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했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만일 땅의 경계로 말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東京)도 우리 경내(境內)에 있으니 어찌 침식했다 하는가. 그리고 압록강 안팎도 우리의 경내이다.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몰래 거주하는데 거칠고 사악하여 길을 막고 있다. 그 길을 뚫고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가 조빙하지 않는 것은 바로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옛 땅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어찌 교빙(交聘)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내 말을 황제에게 보고하면 어찌 기쁘게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소손녕이 강제로 누를 수 없음을 알고 거란 임금에게 보고하고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서희는 소손녕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거란 군영에 7일이나 머물다가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두와 비단 500필을 선물로 받아 돌아왔다.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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