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늦가을 김철(金哲)과 내가 주동이 되어 '간디청년협회'를 만들었던 추억이 어제 같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톨스토이와 간디를 무척 좋아했다. 간디의 자서전 등을 읽었고, 비폭력 채식주의자가 돼있었다.김철과 나는 간디 서거 1주기를 맞아 49년 1월30일 명동 시공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백낙준(白樂濬) 박사가 축사를 했고, 연사는 신영철(申映澈) 중앙대 교수, 송지영(宋志英), 그리고 나 셋이었다. 나는 '간디와 네루의 사상과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갑자기 한 일이라 청중은 200여명 밖에 안되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 나의 첫 강연이었다. 매우 부족한 언변 때문에 간디에 대한 나의 생각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때 청중 가운데 나중에 가까워진 동지가 생겼다. 서울대 철학과 1회생이요 박종홍(朴鐘鴻) 선생의 애제자인 김일남(金日男)과 그 뒤 인도 네루대 교수가 된 불교학자 서경수(徐景洙)였다. 김일남은 유명한 김태길(金泰吉) 교수와 서울대 철학과 동기생이었다. 그를 통해 그 뒤 박종홍 선생도 더러 찾아 뵙게 됐고,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어 그가 중심이 된 신생숙(新生塾) 운영에 나도 참여, 우수한 엘리트들을 배출하는데 협력하였다. 간디청년협회는 얼마 동안 서로 모여서 간디에 대한 책도 읽고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에 대한 연구도 하느라고 했으나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 후 나와 김철 등 몇 사람은 일본에 가 공부를 더하기로 하고 49년 8월 일본 밀항을 결행하게 되었다. 김철, 백동기(白東基) 두 사람은 다른 배로 먼저 갔고, 나는 의형제 같은 김원경(金圓卿) 동지와 뒤따라 부산에서 밀항선을 탔다.
당시 일본거류민단장한테 보내는 국무총리 철기장군의 소개장도 받았고, 한국에 체류 중이던 독립투사 박렬(朴烈) 선생이 일본의 대학 교수들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써주었다. 우리정부는 일본 여권을 내주지 않았으므로 밀항선을 탈 수밖에 없었다. 부산 인근 해안에서 보름동안 대기하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아카자키(赤崎)에서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20톤 정도의 조그만 배에 올랐다. 항해 중 폭풍을 만나 발동이 꺼지기도 하고, 낮에는 대마도 부근에서 일본 경비선의 감시를 받아 고기를 잡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기도 하며 20여 시간쯤 걸려 츠야자키(津屋崎)라는 곳에 도착했다. 모진 비바람 속에 상륙하여 야마타(山田)라고 하는 최씨 성의 선주 양조장 창고에 숨었는데 일본 경찰이 눈치를 채 모두 유치장으로 넘겼다. 열흘쯤 조사 받고 하리오(針屋) 수용소로 넘어갔다. 그 때 우리는 밀항은 했지만 독립국가의 국민이어서 미 군정 하에 있던 일본 경찰에 대해 기세가 등등했다. 경찰서장을 불러 큰소리도 치고 먹을 것도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나와 김원경은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라 해서 조서를 잘 꾸며 주었으나 맥아더 사령부에서 무조건 안 된다 해서 부산으로 송환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대학을 제대로 다니지 못할 팔자로구나 하고 체념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낸 일연(一鳶) 신현상(申鉉商) 선생과 함께 성균관 1호 재실에서 2개월 정도 있게 되었다. 그 때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거듭된 악형으로 하체불구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자주 뵙게 되었다. 심산은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독재자로 강하게 비판하며 백범(白凡)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때 신현상 선생이 "같이 조용히 수양이나 하자"고 권유하셔서 9월 충남 공주에 있는 신 선생 사저로 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이듬해 7월까지 지내게 된다.
공주에 머무르는 동안 신 선생과 절친한 한학자요 애국지사인 창원(蒼遠) 김택(金澤) 선생을 뵙게 되었다. 선생은 뜻이 높고 인격이 고결하여 백범이 친히 방문하여 출사를 권하기도 했던 분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