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김호준 감독이 영화 '어린 신부'의 여주인공으로 문근영(17)을 점 찍고 문근영이 살고 있는 광주에 내려갔다. 그런데 문근영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전작인 '장화, 홍련' 때와는 작품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는 게 이유.그때 남자 주인공 역에 캐스팅됐던 김래원이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김 감독은 얼른 문근영을 바꿔줬다. "근영아, 오빠랑 같이 하자. 같이 출연하면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 통화가 끝나고 문근영이 딱 한마디 했다. "출연할게요."
문근영은 광주 국제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앳된 소녀다. 지난해 '장화, 홍련'에서 늘 겁에 질려 있는 동생 수연 역으로 나왔을 때보다 키가 3㎝나 컸다. 지금 키가 163㎝인데 앞으로 166㎝까지는 더 크고 싶고, 앞으로 더 크면 연극과 미술도 하고 싶다는, 걱정도 많고 꿈도 많은 소녀다.
그러나 4월2일 개봉하는 '어린 신부'에서 문근영은 어린 소녀가 아니라 이미 훌쩍 다 자란 배우였다. 집안 성화에 못 이겨 대학생과 결혼한 여고생 역을 맡았기 때문일까. 자신보다 여덟 살 많은 대학생 남편 상민을 쥐락펴락 하고, 엄연한 유부녀임에도 고교 야구부선배와 은근 슬쩍 바람을 피우는 폼이 제법이다. 이지연의 '난 아직 사랑을 몰라'를 테크노 버전으로 부르는 장면에서는, '과연 이 배우가 어느 정도까지 커갈지' 궁금할 정도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옥상에 올라가는 장면을 찍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원래 여자쪽은 결혼식 날 눈물바다가 되잖아요? 내가 진짜로 엄마랑 헤어지는 것 같고, 내가 어른이 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실 이 영화 찍기 전에는 일찍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마음 바꿨어요. 다 크고 난 뒤인 서른 살쯤에 할 거예요."
유부남 유부녀의 바람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한다. "극중 보은이야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으니까 그렇다 쳐도, 진짜 저라면 절대 바람 안 피워요. 전 제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할 것이고, 그러면 결혼은 행복할 것이고, 그러면 바람 피울 이유가 없잖아요?" 남편이 바람 피우면 어쩔 것이냐는 질문에는 "안 좋은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법이에요"라고 말을 잘랐다.
사실 문근영이 광주 매곡초 4년 때 연예계에 데뷔한 것도 이처럼 미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에서 비롯됐다. 연기하고 싶다고 졸랐는데 집의 반대가 심했다. 어린 딸이 하도 극성을 부리니까 어머니가 옵션을 내걸었다. "그럼,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면 연기해도 좋다."
문근영은 그날 밤부터 기도했다. "엄마가 김대중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안 될 줄 알고 저런 약속을 한 것 다 알아요. 제발 대통령이 꼭 되게 해주세요."
또 하나, 문근영이 들려주는 문씨 일가의 비밀이 있다. 최근 인터넷 예매사이트 맥스무비가 회원 2,513명을 대상으로 '10년 뒤 한국을 대표할 여배우'를 조사했는데, 문근영이 34.94%의 압도적 지지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문소리.
"문소리 언니가 그러는 거예요. '문씨 가문의 영광이다. 우리 잘 해보자'라고요. 저희 문씨 집안이 약속 하나는 잘 지키거든요. 1등이 부담스럽지 않냐고요? 전 아직 어리잖아요. 열심히 하면 되죠, 뭐."
상대역 김래원은 어땠을까. 처음에 전화 받았을 때는 가슴까지 조마조마했다는데. "멋있는 선배님이에요. 오빠가 영화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배역 연구도 많이 하고. 틈틈이 자기가 본 영화 이야기를 해주며 꼭 보라고 추천한 경우도 많아요. 특히 휴 그랜트가 나온 모든 영화를 무척 좋아해요. 그러나 저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인생은 아름다워'같은 따뜻하고 밝은 영화가 좋아요. '어린 신부'처럼요."
그러면 김래원이 처음에 '작업'하던 때의 공약은 어떻게 됐을까. "사주긴 뭘 사줘요? 촬영하다가 틈만 나면 자고, 내가 뭐 사달라고 하면 도망만 다니고. 남자는 원래 다 그래요?"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 "어린 신부" 어떤 영화
상황설정만 보면 '어린 신부'는 억지에 가깝다. 두 친한 집안이 있다. 할아버지끼리 친구다.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두 집안의 손자 손녀가 결혼을 한다. 문제는 손자 상민(김래원)은 26세의 대학생, 손녀 보은(문근영)은 여고 1년생에 불과하다는 점. 부모가 동의하면 그 나이에도 결혼은 할 수 있다해도, 여고생이 결혼을 해서 학교는 어떻게 다니며, 부부생활은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부터 앞선다.
그러나 영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영리하게 이런 걱정을 피해 나간다. 학교문제는 둘의 결혼 사실을 숨기는 것으로, 부부생활은 "고교졸업 전까지 절대 안 된다"는 친정 어머니(선우은숙)와의 약속으로 교묘히 피해버린다. 더구나 보은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보은이 할아버지(김인문)와는 해병대 동기. 비밀이 굳게 지켜질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는 이후 재미난 사건의 연속이다. 미대생인 상민이 보은이 학교에 교생으로 오고, 노처녀 선생님(안선영)은 상민을 졸졸 따라다니고, 보은은 학교 야구부 선배와 사랑에 빠진다. 이미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 진가를 보였던 김래원의 쾌활한 바람둥이 연기, '가을동화'의 어린 송혜교로 이름을 날렸던 문근영의 깜찍발랄한 모습이 로맨틱 코미디에 활력을 불어넣음은 물론이다.
'어린 신부'는 결국 코미디는 소재와 상황 설정도 중요하지만, 이야기의 힘이 더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사투리 쓰는 조폭, 일하기 싫은 경찰관 등 아무리 웃기는 소재가 가득하면 뭐하나. 영화는 때론 입심 좋은 이야기꾼이 필요한 법이다. 그게 작가든, 감독이든. '편지'의 조감독 출신인 김호준 감독의 데뷔작이다. 12세 이상.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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