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근 가상 시나리오2005년 3월30일 오전 7시28분. 이 플랫폼에 도착하면 가쁘던 숨이 거짓말처럼 숙어 들고, 두렁 풀 스쳐 온 바람이라도 불어줄라치면 가볍게 설레기까지 한다. 그 바람을 비집고 시속 300㎞로 내달아온 동차가 들어선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장재리 고속철도 천안아산역사 3층.
차창 밖은 농익은 봄 꽃 천지다. 계절의 진경을 만끽하는 출근길. 수도권 만원 전철에 짐짝처럼 실려 다니던 그 시절에 댈 일이 아니다. 머잖아 선로 옆 과수원들의 복사꽃이며 배꽃이 필 테고 연록의 산들이 녹음에 뒤덮일 즈음이면 충청도민이 된 지 꼭 1년이 된다. 이런 저런 단상들을 즐기는 사이 어느덧 서울역이다(오전 8시09분). 광화문 직장까지는 걷는 시간을 쳐도 10분이면 OK!
2004년 6월. 안양 평촌의 전세살이를 청산하고 이삿짐을 싼 것은 해 걸러 집 구하고 옮겨 다니는 일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었다. 1억5,000만원 전세 보증금에다 2,000만원 융자를 받아 천안아산역 인근의 30평형대 아파트를 덜컥 사고 난 뒤에는 '이래도 되나'하는 의구심도, 경쟁에서 도태된 듯한 자괴감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옮기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집을 나서 직장까지 1시간이 채 안 걸리니 출·퇴근이 편해졌다. 그 뿐인가. 소도시 전원 생활은 기대 이상. 물이며 공기부터가 서울과 다르다. 온천이며 서해 바다도 지척이다. 대형 할인마트에다 백화점 등 있을 건 다 있다. 게다가 조만간 1,000만평 가까운 아산 신도시가 코 앞에 들어선다지 않는가. 초기에야 소외감도 들었지만 최근 들어 서울·수도권 통근자들이 적잖이 늘었고,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물론 아쉽고 불편한 게 없지는 않다. 출근 열차를 놓치면 대책 없이 지각이다. 막차가 저녁 10시라 일거리를 집에 싸 들고 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않고, 저녁 회식자리에 느긋하게 퍼질러 앉을 수도 없다. 각오한 바지만 교통비 부담이 만만찮다. 고속열차 월 통근 정기권 가격이 26만4,000원. 철도청이야 월 60회 타는 것을 기준으로 60%를 할인한 것이라고 생색을 내지만 주5일 근무에 월 60회 승차 기준이라니…. 듣자니, 천안 아산지역 대학을 다니는 수도권 통학생들의 불평도 만만찮다고 한다. 무궁화호 월 정기통학권이 12만7,000원이고, 서울과 대학을 연결하는 셔틀버스비가 12만6,000원인데 고속열차 요금은 2배가 넘는 것. 학교 앞 원룸에서 생활하던 학생들은 더러 원룸 임대료(월 25만∼30만원) 대신 고속열차를 탄다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 이대로도 '충청권 통근'이 숨막히는 서울·수도권 생활의 꽤 근사한 대안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아파트가 아니라 역사에서 20∼30분 떨어진 농가 주택을 구입해서 단독주택을 짓는다면 1억5,000만원 정도에 전원생활도 가능하다지 않는가. 그렇지만 말 그대로 수도권 베드타운으로 정착되려면 직장이나 정부·지자체에서 교통비의 일부를 보전해주거나 요금이 더 내려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요금이 관건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지방 중소도시 반응
고속철도 역사(驛舍)는 지방 생활권의 중심으로 급속히 자리잡고 있다. 주거·상권이 고속철도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주민 생활도 적잖이 변화할 전망이다. 천안시와 아산시의 경우 역사를 중심으로 반경 5㎞ 이내 천안시 불당동 백석동 신방동 쌍용동과 아산시 배방면 일대에만 지난해와 올해 4만 세대 가까운 아파트가 공급됐거나 분양 대기중이다. 부동산 가격도 치솟아 역세권 아파트 값은 평당 600만원에 육박한다. 투기지역으로 묶여 분양률은 60%선에 머물고 있지만 지역 개발이 본격화하면 금새 소진될 것으로 지역 부동산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천안권의 경우 생활패턴의 변화는 크지 않을 전망이다. 한 시민은 "서울이야 기존 새마을호로도 1시간이면 갔는데 고속철도(38∼42분)가 생긴다고 생활이 얼마나 달라지겠느냐"고 반문했다. 늦어도 내년이면 수도권 전철이 닿는 만큼, 굳이 변화라면 인구 증가 등 광역 수도권 편입에 따른 변화에 가속도가 붙는 정도라는 것이다.
반면 대전과 대구, 부산, 광주, 목포 등 고속열차가 지나는 중·남부권은 서울과의 반나절 생활권에 편입되면서 적지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하지만 지역상권이나 문화경쟁력 위축 등은 우려되는 대목. 대구지역 백화점들은 최상위 고객들의 서울 원정쇼핑이 늘어나 매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고, 지방 중소도시 재래 상권의 중추였던 대구 서문시장이나 부산 국제시장 등도 긴장하고 있다. 서문시장 상가번영회 최태경(45) 회장은 "창원 거창 구미 등의 소매상들을 서울 동·남대문시장에 빼앗길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부산 국제시장 의류 도매상인 김춘숙(45·여)씨는 "소매야 별 영향이 없겠지만 우리는 걱정이 태산 같다"고 푸념했다. 지방 대형 병원들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 서울·수도권 병원에도 당일진료·입원이 가능해진 데다 몇몇 병원들은 환자유치 공세까지 펼치기 시작한 것. 경북대병원 영남대병원 등은 첨단 의료장비 도입과 환자 편의제고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고속열차를 이용한 서울지역 대형 오페라 당일 공연상품이 발매되는 마당이니 지역 문화계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 부산지역 연극인은 "제한적인 수요로 명맥을 이어오던 판인데 그나마 잃게 되면 지방 문화산업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대전시연극협회 사무국장 한선덕(42·극단 새벽 대표)씨는 "다양한 지방 문화예술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종합
● 고속철 싸게 이용하려면…
고속철도 운임이 기존 서민 교통수단에 비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이용 패턴에 따라 다양한 할인제도를 활용하면 얼마간은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월 30차례 이상 일정한 노선을 이용하는 통근·통학자는 정기권이 유리하다. 예를 들어 서울―대전 구간 편도 운임이 1만9,700원이니 15차례 왕복을 하면 59만1,000원이 된다. 반면 월 정기권(45만6,000원)을 구입하면 한달 내내 몇 번을 타도 된다.
월 10∼20차례 고속열차를 타는 경우라면 할인카드를 사자. 할인카드는 일종의 맴버십 카드로, 2만5,000∼10만원짜리(6개월 기준)를 구입하면 승차권을 구입시 20회에 한해 평일 30%, 주말 15% 할인을 받는다. 6개월간 서울―대전을 10번 왕복할 경우 39만4,000원이 들지만 할인카드를 사면 카드값 7만원(비즈니스 카드)에 할인요금 27만5,800원으로 5만원 가까이 절약하는 셈. 할인카드에는 비즈니스 카드 외에 동반자 9명까지 할인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는 동반카드와 청소년카드, 경로카드 등이 있다.
고속철도를 아주 가끔 이용하는 경우라면 예매를 서두르자. 출발일 한 달 전에 예매하면 기준요금의 20%, 보름 전까지는 15%, 일주일 전까지 예매하면 7%가 할인된다. 6세 미만 유아는 75%가 할인된다.
자유석 승차권도 있다. 가격은 일반 승차권보다 몇 백원 싼 대신 지정좌석이 없는 17∼18호차에 타야 하고, 운이 나쁠 경우 서서 갈 수도 있다. 대신 출발시간 1시간 전후의 모든 고속열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시간 활용에 유리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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