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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 20돌…한국移通 발자취/"카폰"으로 시작 20년만에 휴대폰 가입 3,000만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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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 20돌…한국移通 발자취/"카폰"으로 시작 20년만에 휴대폰 가입 3,000만명으로

입력
2004.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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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이 29일로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이로써 국내 이동통신 서비스도 이십대 청년의 나이로 접어든다. 1984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의 '차량전화 서비스'로 시작 된 우리나라 이동통신은 80년대의 개화기와 90년대의 성장기를 거쳐 가입자 3,000만명, 연 16조원의 시장으로 발전했다. 카폰에서 화상폰까지, 한국이 세계적인 '이통강국'으로 성장한 20년사를 재조명해 본다.■1984년 카폰 시대 개막… 대당 400만원

외제차가 드물던 시절 고급차를 판단하는 기준은 기어 박스 뒤편에 놓인 카폰의 존재였다. 어지간한 자동차 한대 값을 훌쩍 뛰어넘는 400만원이라는 가격에도 신청자가 쇄도해 개통까지 몇 주씩 기다려야 했다.

이때는 무전기의 원리를 답습한 아날로그 주파수분할다중접속(FDMA) 방식이 사용됐다. 전화를 걸면 기지국에서 주파수를 할당해 주는데, 자동차 한대가 차선 하나를 몽땅 차지하는 꼴이었다.

비효율적인데다 제한된 주파수 때문에 기껏해야 수만명의 가입자가 고작이었다.

차량이 고갯길을 넘거나 속도를 내면 바로 전화가 끊기는 등 통화 품질도 좋지 못했다.

■1988년 휴대폰 등장… 벽돌폰 별명

88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손에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 선보였다. 원활한 대회 진행과 VIP 의전 편의를 위해 도입된 휴대폰은 일반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휴대폰은 유난한 덩치와 무게 때문에 '벽돌 휴대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올림픽 이후 휴대폰 가입자가 폭증, 주파수 포화 문제가 대두되자 단번에 수백만명의 가입자를 수용하는 디지털 방식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유럽식 시분할다중접속방식(TDMA)과 미국식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이 경합을 벌였는데, 92년 정부는 CDMA를 한국의 차세대 이동전화 방식으로 결정했다.

■1994년 세계최초 CDMA 상용화

미국 퀄컴이 개발한 CDMA는 TDMA에 비해 혼신이 적고 가입자 수용량도 뛰어 났으나 실험실 안에서만 성공한 미완의 기술이었다.

94년 SK텔레콤과 국내 업체들이 세계 최초로 CDMA를 실용화하는 쾌거를 거둠으로써 이통강국의 기반을 다졌다. 미국은 한국에서 확인된 기술로 음성통화와 데이터통신이 가능한 개인이동통신서비스(PCS)를 시작했으며, 우리나라도 97년부터 KTF와 LG텔레콤이 PCS 서비스에 나서 이통 산업의 꽃이 활짝 피었다. 이를 계기로 81년 시작된 무선호출기(삐삐) 서비스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2002년 IMT-2000 서비스 시작

2002년 실시간동영상(VOD) 및 화상전화가 가능한 'CDMA2000 1x EVDO' 서비스가 출현하면서 본격적인 IMT-2000 멀티미디어 이통 시대가 열렸다. 휴대폰으로 게임도 하고 사진도 찍어 보내며 일정 관리에 뮤직비디오 감상까지 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는 20년 전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휴대폰 가입자 수도 2003년 3,000만명을 돌파했다. SK텔레콤이 99년 이통사 최초로 1,000만명 가입자를 돌파한지 3년 만이다. '1인 1휴대폰'이 현실이 된 가운데, 3세대 이동통신(WCDMA)이 한국 이통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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