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 시절에 인연을 맺은 사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장준하(張俊河) 선배다. 그는 족청 중앙훈련소의 초대 교무처장 송면수(宋冕秀) 선생에 이어 2대 교무처장으로 왔다. 평북 용천 출신으로 나보다 세 살이 많은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을 탈출, 광복군 장교가 됐다. 해방 후 귀국해 족청에 들어온 그와 5개월가량 같이 지냈다.첫 인상은 너무 차가웠다. 술 먹는 자리에서 잔을 뒤집어 놓고 성경책을 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 냉철하고 자기 일에 철두철미했다. 그러나 나와는 잘 통했다. 내 얼굴이 니체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문서나 글을 쓸 일이 생기면 나보고 주로 쓰라고 했다.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 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극우 사상을 가졌었다.
그러던 그가 철기 장군을 조금씩 비판하더니 어느 날 단복을 벗어서 장군 앞에 갖다 놓고 "나 떠납니다" 하고는 가버렸다. 김구(金九) 선생과 가까왔던지라 아무래도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지지했던 철기장군과 잘 지내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다.
장 선배와 나는 몇 년 뒤 한국전쟁 중 부산 피란시절에 종합교양지 '사상(思想)'을 함께 만들며 다시 한번 같이 일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장 선배는 전시에 국민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문교부가 설립한 '국민사상지도원' 기획과장을 맡고 있었다. 백낙준(白樂濬) 문교부장관의 친구인 한진희라는 분이 원장을 맡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장 선배가 그 일을 다 했다. 장 선배는 나보고 편집을 맡으라고 했다. 3개월 가량 준비를 해 잡지를 냈는데 모두 4호를 냈다. 8, 9개월 동안 장 선배를 도와 형제처럼 지내며 열심히 일했다. 부산의 다방들에 주로 모이는 지식인, 문인들을 찾아 다니며 필자를 교섭했다. 종이는 미국 공보원장 슈바커에게 얻었고, 인쇄비와 원고료는 이교승(李敎承) 국회의원이 대주었다.
한번은 그때 이미 유명했던 철학자이며, 지금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는 고건(高建) 국무총리의 아버지인 고형곤(高亨坤) 이화여대 교수를 찾아 갔다. 경남도청 뒤 가건물에 있던 이화여대 임시 교사로 찾아갔더니 바빠서 원고 쓸 새가 없다면서 문리대학장을 소개해주었다. 첫 인상이 해맑고 지성적인 여자 학장이었다. 원고 얘기를 꺼냈더니 자기도 잡지를 봤다면서 훌륭한 잡진데 어떻게 경영이 되나, 몇 부나 찍나 등을 자세히 묻는 것이었다. 인상도 깨끗하고, 커피도 시켜주면서 친절히 대해주는 바람에 경영내용과 발행부수 등을 숨김없이 얘기해주었다.
돌아와서는 장 선배에게 원고 청탁이 잘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뒤 장 선배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장 선배는 "이화여대 가서 무슨 얘기했는가" "그 학장이 누군지를 아는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여자는 바로 이기붕(李起鵬)씨의 처인 박 마리아였다. 이기붕씨는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조지 백'으로 통하며 미국 조야에서 차기 한국대통령 감으로 물망에 오르던 백낙준 장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백낙준 박사가 흥사단과 서북 세력을 규합해 자기 세력을 만들려고 잡지를 내고 있다"고 고자질 했다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백 장관을 불러 나무랐고, 이교승 의원에게도 경고를 했다는 것이다. 장 선배가 백 장관에게 언짢은 얘기를 듣고 나에게 확인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28세였던 그때 복잡미묘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맥이었다.
결국 '사상'지는 폐간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 선배와 나는 그 일로 우정이 변하거나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다. 그 뒤 나는 대한적십자사 직원이 되어 전과 같은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장 선배는 훗날 '사상계'를 다시 발간하면서 개혁사상을 갖게 되고 박정희(朴正熙) 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본인이 대통령을 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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