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나라 국왕은 루이16세였다. 그리고 1814년 왕정 복고와 함께 즉위한 사람은 루이18세다. 그 사이에는 17이라는 숫자가 빠져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저도 모르게 이 숫자를 부여 받았던 어린아이다. 루이 샤를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1785년 3월27일 베르사유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왕 루이16세였고, 어머니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루이 샤를이 네 살 때 프랑스 혁명이 터졌고, 여섯 살 때 국왕 가족이 국외로 달아나다가 붙잡힌 사건이 일어났다. 파리 시민은 분노했고, 이듬해 아이는 가족과 함께 파리 탕플 감옥에 갇혔다. 아이가 여덟 살 때인 1793년 1월 아버지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프로이센의 뒤셀도르프로 피신해 있던 국왕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뒷날의 루이18세)은 형이 처형된 직후 탕플 감옥의 조카를 프랑스 왕으로 선언했다. 당시 프랑스가 공화국이었던 만큼, 이 선언에는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러나 프로방스 백작은 왕정복고 뒤 즉위하면서 자신을 루이18세로 칭함으로써, 조카가 루이17세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했다.
루이 샤를은 아버지를 잃은 해 10월 어머니마저 단두대에서 잃었다. 그리고 두 해 뒤 탕플 감옥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10세였다. 관례대로 부검이 이뤄져 의사가 심장을 도려냈다. 이것이 공식 기록이다. 그러나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외국으로 빼돌려졌다는 소문이 곧 떠돌기 시작했고, 왕정복고 뒤에는 루이 샤를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아이의 심장은 유럽의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1975년 파리 근교 생드니 성당 지하실의 부르봉 왕가 묘소에 안장됐다. 루이 샤를이 태어난 해에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라는 사람이 39세로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이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이 다음 번 이 난의 소재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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