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은 속으로 억울할지 모른다. 탄핵 이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 특히 선거법 위반이라는 선관위의 해석까지 나왔으며,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도는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도 낮았다. 마지막 화해처인 기자회견에서조차 사과는커녕 공격적 언행으로 정면 승부를 피할 수 없도록 유도한 측면도 있고, 개인의 명예를 공공연하게 실추시킴으로써 한 가족의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기까지 하였다. 더욱이 여당 의원들의 불법적 의장석 점거사태에도 불구하고 적법 절차를 거쳐 이루어낸 사상 초유의 탄핵이었다.그런데 막상 탄핵이 가결되고 나자 하루아침에 상전벽해가 되고 말았다. 성난 국민들이 촛불시위에 쏟아져 나오고, 탄핵에 찬성한 193명 의원들의 명단이 마치 무슨 수배전단처럼 돌아다니고, 야당은 국민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사과도 해명도 소용없다. 탄핵 전날까지 여론조사에서 여당 후보를 두 배 이상 앞서가던 지역구들에서도 일제히 두 배 이상 뒤지는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다. 천막당사로 옮겨도, 당대표를 바꾸어보아도, 백약이 무효다. 야당 후보들은 아예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거운동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개혁이라는 정치적 아젠다를 여권에 독점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 탄핵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꼭 노 대통령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대통령 개인의 낮은 지지도가 잘 보여준다. 지역구의 지지도가 뒤바뀌는 것도 갑자기 열린우리당 후보가 좋아져서가 아니다. 여당 지지도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높아진데서 지지도 상승은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970,80년대의 질곡을 거쳐온 국민들의 정치적 정서는 개혁의 방향을 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탄핵은 야당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달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정치개혁을 원한다면 '선택의 여지없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거란 어찌 보면 땅 따먹기이다. 유권자라는 땅에 누가 더 많은 깃발을 꽂느냐의 문제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성향은 개혁 쪽에 가있는데, 야당은 그 드넓은 땅을 모두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내어주고 한쪽 좁은 구석에 몰려서 복작대고 있었던 셈이다. 야당은 진작 환골탈태하고 개혁의 아젠다에 동참했어야 했다. 개혁은 노 대통령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86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진보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건전한 보수나 열린 사고를 가진 기성세대도 얼마든지 개혁할 수 있고, 그것이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야당은 그것을 하지 못했다.
이제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이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번 총선은 파토스(Pathos)의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물과 정책을 보는 로고스(Logos)의 선거가 아닌, 사실이든 아니든 역사를 되돌리려는 무엄한 시도를 했던 것으로 '비쳐졌던' 자들에 대한 추궁과 심판의 선거가 될 전망이다. 각종 여론조사는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최소한 수도권에서 야당은 전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야당의 전멸은 설사 승리한 당이 전지전능한 당이라 할지라도 건강하지 못하다.
하물며 파토스의 선거를 통해 나타난 그러한 결과는 더더욱 건강하지 못하다. 이번 사태를 통해 야당이 국민에게 저지른 최대의 과오는 탄핵 그 자체라기보다도 국가적으로 이 절박한 시점에서 차분한 정책논의의 공간을 폐쇄해버리고 감정의 대립공간을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이 과오를 씻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총선 이전이 되었든 이후가 되었든, 야당 의원 중 일부만이라도 그 비좁은 곳에서 빠져 나와 여권이 독점하고 있는 개혁이라는 아젠다를 분할하고 경쟁을 통해 더 좋은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장 덕 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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