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경 지음 푸른숲 발행·1만2,000원
어떤 사람들에게 환상이라는 것은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환상 속으로 숨어버리는 도피가 아니라 환상을 품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서다. 그래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환상을 버리지 마라. 환상이 사라져버리면 존재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형경(44)씨가 다섯번째 장편소설 '성에'를 출간했다. 장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낸 지 2년반 만이다. 그는 '사랑을…'에서 "자기를 확인하고 한계와 투쟁하며 자아를 확장해나가는 것"으로서 여성의 사랑을 그렸다. 사랑이라는 테마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탐구했던 이 소설에 비해, 신작은 전편의 관심을 이어가면서도 서사의 구조가 좀더 흥미로워졌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단하게 짠 문장과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것이, 공들여 쓴 작품임을 가늠하게 한다.
김씨가 작품의 전제로 두는 것은 사랑과 환상이 같다는 등식이다. 옛 연인들이 12년 만에 만났다. 먼저 만남을 청한 쪽은 여자다. 미련도 미움도 아니라 "다만 환상 때문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받아 안는 것이 비록 냉소와 환멸 뿐이라 해도 환상 따위에 속고 있는 것보다는 그 실체를 직면하는 일이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연희와 세중의 재회가 하나의 이야기다. 여기에 두 사람이 공유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맞물려진다. 그들이 12년 전 숲속 외딴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함께 기거했던 '사체들'의 이야기다.
각자 연인이 있었던 연희와 세중은 직장에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산 깊은 곳 숙소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눴던 게 남아있는 사랑의 '환상'의 전부가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는 연희와 세중 뿐만 아니라,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공평하게 성(性)을 분배하면서 일처다부제의 생활을 유지했지만, 여자가 아이를 갖게 되자 갈등이 불거졌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다. 이 기이한 사연을 연희와 세중의 입이 아닌 청설모와 박새, 참나무와 바람 등을 통해 알리는 게 작품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시도다. 자연물이 들려주는 얘기는 제도에 대한 환상을 질타하는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로도 들린다. "박새는 인간들이 안쓰러웠다. 어떤 생물의 본성에도 맞지 않는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를 만들어놓고 야성의 생물들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일종의 보상심리나 히스테리처럼 보였다."
연희가 세중과의 만남을 통해 그간 품어왔던 사랑이 환상이었다는 것, 그러면서도 환상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결말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모아져 있다. "가장 조심할 일은 환상을 현실 속에서 성취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환상은 손에 넣는 순간 즉시, 필히 환멸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불행하게도 환상이 현실이 되어 환멸이 찾아온다면 그 환멸을 또 하나의 현실로 인정한 다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멀고 먼 환상을 새롭게 영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환상이 현실을 위태롭게 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필요조건이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쓸쓸하지만, 삶의 한 진실이기도 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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