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철한 민족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장군. 저 유명한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탁월한 전략가인 장군을 처음 본 것은 1946년 10월 9일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조선민족청년단 창립식 때였다. 그 후 2년 동안 수원의 족청 중앙훈련소에서 그분을 가까이서 모셨다.훈련소 숙소 1호실이 철기장군의 방이었고, 7호실이 내 방이었다. 장군은 새벽같이 일어나 직접 장작을 쪼개 불을 지피고 손수 차를 끓여 마시곤 하셨다. 아침 6시면 전 훈련생이 도열해 승기식(昇旗式)과 조례를 하는데 한 겨울에 젊은 훈련생들도 추워서 귀를 비비며 벌벌 떨고 있는데 장군은 단상 위에 올라 열정적인 훈화로 청년들을 휘어잡았다. 그 때 장군의 나이가 45세였지만 젊은 우리보다 강건했다. 독립운동을 한 이들이 많았지만 일선에 나가 목숨을 걸고 항일무장투쟁을 한 전략적 지휘관으로는 그에 견줄만한 이가 거의 없다.
그런데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장군이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혁명 선배는 예관(倪觀) 신규식(申圭植), 백범(白凡) 김구(金九),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등 몇분 뿐이었고 그 밖의 많은 파벌로 갈리어 통일 전선을 이루지 못하는 정객들은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 같지 않았다.
김준엽(金俊燁) 장준하(張俊河) 같은 학병 출신들이 임시정부 노 지도자들과 정객들에게 실망하고 철기장군을 쫓아간 까닭도 장군의 열정적 지도력에 매력을 느낀 때문이었다.
타고난 무인이며 탁월한 전략가인 그에게는 뜻밖에도 문학적인 열정이 있었다. '우둥불''톰스크의 여인' '방랑의 정열' 등 직접 쓴 소설도 있을 정도다. 교무처에서 일할 때 때때로 장군을 따라 수원 용인 등의 야산으로 꿩 사냥을 가곤 했다. 사냥을 끝내고 석양을 바라보면서 파이프 담배를 문 채 감상에 젖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47년 가을이었다. 나는 주로 묘향산 사찰과 집에서 와세다(早稻田)대 강의록과 사상서적으로 독학을 한 것 외에는 학력이 거의 없어 정식 대학교육을 받고 싶었다.
족청 생활을 1년쯤 하고 나서 대학진학을 하기 위해 백낙준(白樂濬) 박사를 찾아가 상의했다. 백 박사는 연세대 편입은 어렵다며 국학대학장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중앙훈련소에서 많이 뵌 위당 선생을 흑석동 댁으로 찾아갔다. 훈련소에 자주 오셔서 나를 익히 아시는 선생께서는 내 뜻을 환영하면서 철기 장군과 상의하겠다 하셨다.
며칠 뒤 철기 장군은 "위당 한테서 동지 얘기를 잘 들었는데 1년만 더 훈련소 일을 잘 하면 오래지 않아 족청이 크게 발전할 것이고, 그 때에는 대학 공부는 물론이고 외국유학까지 시켜줄 수 있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48년 족청은 해산이 되고 단장인 철기 장군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는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 등과 갈등이 많은 족청을 해산하고, 5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철기는 그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족청 해체를 반대한 동지들이 많았는데 그 동지들의 뜻을 대표하여 몇몇 사람이 보라매동창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족청에 참여했던 동지들과의 조직적 연락을 계속했다. 보라매는 족청을 가리켜 정인보 선생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 때 회장은 뒤에 국회의원을 한 김동욱(金東郁)이고, 부회장은 김철(金哲), 조직부장 겸 연락부장은 내가 맡았다. 그러나 보라매동창회는 5, 6개월 동안 동지들과의 연락활동을 지속하다가 마침내 서울시경에 모든 서류가 압수되고 해산명령을 받고 말았다.
철기 장군은 초대 국무총리 자리에서 8개월 만에 물러나고, 그 뒤 주중대사 재임 시기인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이 박사의 부름을 받고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정치파동에 개입했다. 그 때 장준하 선배나 나는 거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로 인해 순수 청년운동단체였던 족청에 큰 허물이 되고 오해를 받게 된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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