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책은 없다. 하지만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는다." "삼성화재를 꺾을 히든카드가 있느냐"는 질문에 현대캐피탈 김호철 감독은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 "삼성화재가 지금까지는 거의 공짜로 우승컵을 주워 왔겠지만 앞으로 우승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다. 단순히 엄포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자신감 뒤에는 동석한 비디오 분석관 도메니코 라사로(52·이탈리아 트레비소 시칠리아팀 소속)씨가 있다. 라사로씨는 "준비는 끝났다. 삼성화재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지쳐 있는 반면 현대캐피탈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우리는 이길 준비가 돼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24일 오후 경기도 용인 현대캐피탈 체육관에서 만난 김 감독과 그의 이탈리아 친구인 라사로씨는 27일 시작하는 배구 V―투어 결승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민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배구 비디오분석관 라사로씨는 김 감독의 SOS요청을 받고 16일 입국, 현대캐피탈 팀과 숙식을 함께 하며 '타도 삼성화재'를 위해 자신의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둘은 김 감독이 1987년 이탈리아 트레비소팀에서 선수로 활약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고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다.
김 감독은 민모가 가져온 컴퓨터 분석프로그램 '다타볼리'를 앞에 놓고 전략을 숙의하고 있었다.
비장의 무기 다타볼리
다타볼리는 이탈리아 프로배구에서 쓰는 일종의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 9㎡의 코트를 9개 구역으로 세분해 공격수의 위치와 토스 및 스파이크 유형에 따라 볼의 낙하지점을 나눠 수치화하거나 그래프 및 동영상화해 한 눈에 보여준다.
물론 이 프로그램에는 삼성화재의 최근 4경기에 대한 분석자료가 담겨있다. 가령 3번을 입력하면 김세진의 스파이크 각도와 방향, 특징 등이 10여가지 항목으로 세분돼 나와 있어 그의 공격 루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민모는 "다타볼리는 선수 개개인의 모든 경기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것을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다. 나의 역할은 감독이 전략을 짜는 데 필요한 자료를 즉시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감독도 "데이터를 잘 분석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데이터를 3, 4경기 누적해 보면 선수의 습성을 알 수 있다. 급할 때는 이런 습성이 나오게 되고, 승부처에서 1, 2 포인트를 잡아내는 것이 데이터 분석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천기 누설은 안돼
그렇다면 다타볼리로 분석한 최강 삼성화재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 민모에게 묻자, 김 감독은 "그걸 왜 물어요?"라며 말을 막고 나선다. 결승전이 끝나기 전까지 절대 말해줄 수 없단다. 벌써 두 팀 사령탑간의 물밑 신경전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세진 선수의 공격 습성은 어떠냐"고 재차 묻자 "그걸 얘기하면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이 전략을 다 바꾼다"며 역시 대답을 회피한다. 대신 김 감독은 "다타볼리를 보면 김세진이 때릴 때 어디에서 블로킹하고 수비해야 하는 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 상대 공격을 잡아낼 한방의 '블로킹'을 위해 다타볼리를 긴급 도입한 셈. 김 감독은 "블로킹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센터블로킹이 상대 공격을 미리 파악한다면 그만큼 성공확률은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현대캐피탈 센터 방신봉도 "다타볼리 자료를 보면서 삼성화재의 오른쪽 공격을 잡아내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배구는 서브 강화가 필요
현대캐피탈에 자신의 데이터 분석기법을 전수해줄 예정인 민모는 한국 배구에 대해 "유럽배구와 달리 감독의 작전과 세트플레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배구는 서브가 강하고 경기흐름이 매우 빠르다. 한국 배구에 강력한 서브를 결합한다면 이상적인 스타일의 배구가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김 감독이 강조하는 스피드 배구와 일맥 상통하는 대목이다. 민모는 "이탈리아에서는 김 감독이 말하면 모든 사람이 모자를 벗고 정중히 답례를 할 정도로 신화적인 존재였다"며 "한국에서도 잘 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과연 데이터로 무장한 김호철식 배구가 뚝심을 강조하는 삼성화재 신치용의 자칭 '촌놈 배구'를 넘어설 수 있을 지 주목된다.
/박진용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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