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선수(選數)도 성(性)도 없다. 계보도 필요 없고, 이미지만 남아있다. 17대 총선을 앞둔 지지율 경쟁이 50년 이상 지켜오던 한국정당의 '규칙'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각 당이 시장에서 퇴출 당하지 않으려고 수요자의 욕구를 좇다가 내부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정당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도 새로운 룰에 적응하는 자와 적응 못하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적자생존의 성격을 띠고 있다.우선 눈에 띄는 뉴 트렌드는 세대교체, 다시 말해 연령파괴다. 17대 총선 지역구 공천자 연령별 분포를 보면 40대가 전체 668명 중 40%가량으로, 사실상 주력 부대로 부상했다. 유신시대와 1980년대 격변기를 겪어온 이들이 우리 정치의 주도 세력이자 핵으로 성장한 것이다. 반면 과거 정치권의 주축이었던 4·19세대와 6·3세대는 각각 57명과 94명에 불과, 급격한 퇴조 양상을 보이고 있다.
23일 한나라당의 전당대회를 끝으로 각 당의 지도부는 사실상 40∼50대가 장악했다. 52세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51세의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46세 민주당 추미애 의원 등 여야 지도부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들은 모두 재선 그룹이다. 지금까지 각 당의 주요당직과 국회 상임위원장직 등을 인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선수였다.
이들의 등장은 과거 돈과 조직으로 점철됐던 '계보 정치'가 정치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 정당의 내부 역학구도는 곧 계보였다. 계보의 세력은 또 보스가 얼마나 정치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가가 좌우했다. 그러나 '민정계' '상도동계'에 이어 '동교동계'도 실세(失勢)하면서 대중적 인기 만으로 무장한 '일인 거사'들이 속속 당권을 장악했다. 인기가 높으면 주류, 없으면 비주류가 되는 세태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과거 산업화 및 5,6공 시절의 지배적 가치관과 단절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때문에 한국정치를 주름잡은 기존 주류 세력이 일시에 몰락하고 있다"며 "새롭게 부상한 세대에는 스스로를 규제하는 룰이 없어 직접 국민을 상대할 수 있는 정치인에게 힘이 쏠리고 있다"고 말했다.
성차별이 파괴되고, 여성 파워가 크게 신장된 것도 주목 대상이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원내1당 대표로 선출되는가 하면, 여야 주요 3당의 대변인을 모두 여성이 맡고, 역대 총선에서 가장 많은 여성 후보들이 지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일각에선 "소수 여성 명망가들의 정계 진출이 남성들의 간택에 의해 이뤄지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여성 인사들은 단지 들러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많다.
새로운 흐름이 정책이나 이념 대결보다는 '이미지 정치'에만 너무 치중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비난도 만만찮다. 콘텐츠가 파괴됐다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천막 당사'와 '공판장 당사' 경쟁에도 이 같은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다.
경희대 정하용 교수는 "정책을 놓고 각 정당과 후보들이 정견을 밝히고, 유권자의 꼼꼼한 평가를 받는 게 선진정당의 모습"이라면서 "이미지 경쟁은 역으로 정당의 대안 제시를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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