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바뀌고 산천이 변하면 사람들의 입맛도 간사해지는 법. 하지만 자장면은 예외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자장면에 관한 추억이 한두가지씩은 있고 어릴 적 동네 중국집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에 입맛을 다시던 일도 잊지 못한다. 오죽하면 ‘옛날짜장’이라는 메뉴까지 나왔을까.어떤 특별한 날,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중국집으로 가던 때의 즐거움, 나무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올려 입으로 가져갈 때의 행복감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하얀 면에 검은 춘장을 비벼 먹다 보면 입가 여기저기에 묻어나던 검은 자국들, 그리고 으레 남기곤 했던 양파 등의 건데기. “건데기가 더 영양가 있는 거야.” 지켜 보던 엄마의 한마디가 이어지면 마지못해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곤 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이야 워낙 음식이 다양해지고 질도 높아졌지만, 자장면은 만인의 영원한 향수다. 아무리 맛있고 비싼 중국요리를 먹는다고 해도 마지막에 자장면으로 마무리를 하지않으면 왠지 허전하다. 거창한 인테리어로 장식한 화려한 집보다 동네 어귀에 있는 허름한 중국집에서 먹는 자장면이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추억을 함께 먹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자장면도 많이 업그레이드 됐고 주방의 손맛보다 기계에 의존하는 집이 대부분이다.
그렇다 해도 ‘자장면의 추억’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자장면의 변신을 즐기며 오가는 길에 중국집이 눈에 띄면 한번 들어가보자. 주방 옆 틈새로 보이는 밀가루 반죽 치는 조리사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수타 옛날자장면-옛날손짜장(오모가리) 잠실점 (02)416-0067, 충무로점 (02)2266-9259
서울에서 자장면이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집은 뜻밖에도 김치찌개도 같이 하는 자장면전문점이다. 잠실 롯데월드 맞은 편 석촌호수 변에 자리한 이 집 자장면을 먹으려면 항상 기다려야 하는데도 사람들이 줄을 선다. 오픈한지 6년이 됐는데도 한결같다. 천리안 식도락동호회를 이끌고 있는 송영민(39) 한국정보처리학회 차장은 “아마 한국에서 자장면이 가장 많이 팔린 곳일 것”이라고 말한다.
자장면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또 어떻게 만들길래?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자장에 특별한 육수를 넣는데 재료와 배합비율은 이 집만의 비밀이다. 양파와 양배추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수분도 자장 맛을 돋워준다. 춘장을 볶을 때도 최고급 기름만을 쓴다고 한다.
특히 고기는 절대 냉동육을 쓰지 않고 생고기를 넣는다. 일반 고기보다 원가가 5배 이상 비싸지만 사육 단계부터 정성을 기울인 유명 최고급 고기를 고집한다. 특히 이 집 면발은 힘이 있고 맛있다. 수타로 뽑아서이기도 하지만 일정한 온도에 24시간 잘 숙성시킨 덕분이다. 자장면이 고소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4,000원.
6년전 오픈한 이 집은 1층에서 자장면을 팔지만 2층에서는 김치찌개를 전문적으로 판다. 3년 동안 지하 10℃ 게르마늄 저장고에 묻은 항아리에서 숙성시킨 김치로 깊고 진한 김치 맛이 일품이다. 지하 저장고는 참숯과 황토흙 게르마늄 자갈로 채워져 있다.
소금도 3년간 숙성시켜 간물을 뺀 것이어서 이 집만의 김치찌개 맛을 내는데 일조한다. 서울시내 택시 운전사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24시간 문을 여는데도 늘 붐빈다. 주인 문인술(54)씨는 “음식에 들어가는 육수와 고기, 야채, 그리고 물 하나하나까지 아무 재료나 쓰지 않는 정성이 맛을 낸다”고 말한다.
연한 자장-신신원 (02)735-0465 인사동, (02)732-8110 청진동
원래 자장면에 뿌려 먹는 춘장의 주재료는 콩. 자장면 맛을 고소하게 만드는 것은 춘장 덕이다. 인사동에 있는 신신원은 원래의 콩 맛에 충실한 자장면을 내놓는다.
중국 음식 주방 경력 36년의 주인 신우일(50)씨는 춘장에 콩을 추가로 갈아 넣는다. 현대식 춘장이 예전보다 콩을 적게 사용하는 것이 안타까워 콩을 더한 것. 그래서 색상이 노르스럼하다. 콩이 적게 들어가면 자장면 맛이 덜하다는 것이 그의 믿음.
불린 콩을 잘 갈아서 고기와 함께 기름에 적당히 볶는 것이 기술이다. 잘못 볶으면 비린내가 나고 더 볶으면 타 버린다. 대신 춘장은 적게 쓴다. 콩이 조미료 역할을 해줘 일반 자장면보다 더 고소해진다. 이 때 춘장을 많이 쓰면 콩 향이 죽어 버리고, 적으면 콩 향이 너무 살아 버리니 적당히 조절하는 것도 노하우다. 춘장이 적게 들어가 일반 자장면보다 부드러움은 덜하다. 4,000원. 물만두와 오향장육도 유명하다. 청진동에서 같은 상호로 가게를 하는 동생 신금수(45)씨는 형에 비해 춘장을 진하게 쓰는 편.
칼라 자장면-복성각 (02)364-1522, 7507 신촌
자장면을 노랑, 빨강, 검정, 파랑색으로 맛볼 수 있을까? 복성각은 각양각색의 자장면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노랑 자장면은 어떻게 만들까. 중국에서 가져온 특별한 장이 사용되는데 춘장보다 순하고 담백하다. 국물이 넘쳐날 듯 걸쭉한 것이 특징. 주인 주기준(47)씨는 재료 공개를 거부한다.
매운 맛을 보고 싶으면 빨강 자장면과 고추자장면이 기다린다. 빨강 자장면은 매운 것을 좋아하는 중국 쓰촨(사천)식으로 고추기름과 청양고추를 듬뿍 사용한 장을 면발에 비벼 먹는다. 뻑뻑한 짬뽕 국물처럼 보인다. 채로 썬 야채가 면과 비벼지면 더 맛깔스럽다.
일반 춘장에 볶은 청양고추를 넣어 만든 고추자장은 파란 색 고추를 씹는 순간 매운 맛이 혀끝에 와닿는다. 칼국수보다 더 넓게 뽑아낸 면발에 춘장을 비벼 먹으면 같은 재료라도 맛이 달라진다. 입에서 면발이 돌아다니는 듯 씹는 질감이 색다르다. 춘장에 시금치나 케일 갈은 즙을 넣어 만든 파랑 자장면은 색깔은 낯설지만 맛은 제법 괜찮다. 3,000~4,000원.
진한 자장-신승관 (02)735-9955 종각 제일은행 옆
춘장에 물을 타 조금 묽게 만들면 자장면, 물을 타지 않으면 간자장이라고 한다. 물기가 없다는 의미에서 건(乾)자장이 원래 이름이지만 발음은 ‘간’이 돼버렸다.
이 집 자장면은 물을 적게 탄다. 춘장으로만 볶아 면에 춘장 맛이 깊이 배게한다. 특히 양파 호박 양배추 등 야채를 오래 볶아 나오는 수분 위주로 자장면을 만들어 진한 편이다. 실제로 이 곳 간자장을 먹어 보면 춘장 맛이 구수하고 진하다. 물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해삼 새우 오징어를 추가한 삼선자장면, 춘장 대신 고춧가루를 넣고 볶은 사천자장면, 모듬 야채와 고기를 잘게 다져 볶은 유니자장면 등도 맛있다. 주인 장경문씨와 부친인 장학맹 옹, 아들 등 3대가 함께 40년 전통의 맛을 잇고 있다. 자장면 3,000원. 해삼주스와 복탕수육, 물만두가 별미.
향토 자장-자금성 (032)761-1688 인천 화교촌, 태화원 (032)766-7688
천연 춘장은 오랜 기간의 발효 식품이라 향이 진하다. 노란 빛이 감돌고 시큼하면서도 특유의 향이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천연 춘장이 많이 들어간 자장면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중년을 넘은 사람들은 이 맛에 더욱 익숙하다.
자금성에서는 재래식 방식으로 직접 담근 춘장을 넣고 자장면을 만든다. 일반 시중의 춘장에 전통 춘장을 조미료처럼 넣으니 옛날 자장면 맛이 더 강하게 나는 셈. 이 집에서 향토자장면을 시키면 조금 질고, 간자장을 시키면 된 것이 차이점이다. 고기 새우 해삼 양파 감자 부추 등 10여가지의 재료가 야채썰 듯 들어간 것이 특색. 다져 넣지 않는 것은 젓가락으로 잘 집으라는 배려에서다. 4,000원. 쓰촨자장면과 유니자장면도 주문하면 해 준다.
수타 자장-현래장 (02)712-0730 마포역 근처
면발을 기계로 뽑지 않고 손으로 뽑는 것은 수타면. 커다란 도마에 반죽?치고 늘이고 감는 과정을 거쳐 쫀득쫀득하고 감칠 맛이 난다. 덩달아 소화까지 잘 된다. 주인 주명연(52)씨는 “수타 과정에서 밀가루 안에 있던 공기층이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집은 지나가는 행인들이 유리창을 통해 주방에서 조리사가 수타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53년 역사. 감자와 단호박 콩이 들어 가는 옛날 자장면은 4,000원. 납작한 접시에 쟁반식으로 자장면을 내놓는 쟁반자장면은 이 집의 자랑거리이다. 해삼과 새우 각종 해물이 채로 썬 채로 들어간다. 삼선자장면은 쟁반자장면과 같은 재료를 쓰지만 크고 납작하게 써는 것이 차이점. 양파가 많이 들어가 감칠맛이 난다.
■손덕준 인천 '자금성' 사장
“자장면은 중국 음식이 아니에요. 한국 음식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자장면 메뉴가 있어요. 반면 중국 사람이 모인 지역에선 자장면을 보기 힘들죠.”
인천역 맞은 편에 자리한 차이나타운.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만든 기둥문이 돋보이는 이 곳에서 맛있는 자장면 만들기로 소문난 ‘자금성’의 주인 손덕준(48)씨가 자장면 이야기를 털어 놨다. 인천시는 1998년 자장면을 향토음식으로 지정했는데 여기엔 손씨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과거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해상무역이 활발할 때 인천에는 중국인 노무자들이 많았습니다. 주로 산둥성 출신인 이들은 간단한 식사로 불린 면에 춘장을 비벼 먹었는데 워낙 노무자가 많다보니 이 메뉴를 파는 가게가 날로 번창했죠. 이 때부터 자장면이 여기저기 퍼져 나간 것이지요.” 그가 이렇게 ‘자장면의 인천 원조설’을 주장한다.
콩과 밀가루를 섞어 햇볕에 1년 이상 발효시킨 춘장은 산둥성 고유의 음식으로 우리의 된장에 해당한다. “옛날 자장은 계절별로 재료가 달랐어요. 겨울에는 배추를, 봄에는 감자나 고구마 등을 넣었지요. 요즘은 양파를 많이 넣는데 전에는 양파 대신 대파를 썼어요.” 집안에서 일찍이 중국집을 운영한 탓에 “엄마 젖을 떼고부터는 자장면만 먹고 살았다”는 그는 3대째 요리사 가업을 잇고 있다.
“전에 부모님께서 옥상 항아리에 춘장을 담궈 자장면을 만드셨어요. 지금은 공장에서 만든 춘장을 많이 쓰는데 직접 담근 춘장을 함께 섞어 쓰니 더 맛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는 “지금 옛날식 춘장 만으로 자장면을 만들면 못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옥상의 항아리에서 직접 춘장 맛을 보니 짭짜스름한 맛에 여간 향이 강하지 않다. 이 맛 때문인지 이 집에는 멀리서도 옛날식 자장면을 맛보러 먼 걸음을 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자장면은 이제 가장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에요. 사람들이 너무나 맛을 잘 알아 여간해선 맛있다는 소리를 못들어요. 고급 중국 요리와 달리 자장면 맛은 누구나 금방 평가하거든요.” 그는 “한국에 있는 중국사람들이 처음 자장면을 만들었지만 자장면은 이제 자장면은 한국 고유의 음식이 됐다”며 “대중성이나 맛에서 세계적인 음식으로 키워도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인천=글 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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