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51)씨의 화폭에서 봄은 물고기의 등을 타고 앉아, 혹은 물고기의 등에 물구나무 서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온다. 봄 햇살에 일렁이는 물결이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사각의 화폭을 벗어나 분출된다. '물들아/ 여전히 그 한 자락을 휘감아 흐르고 있느냐/ 어린 생명붙이들을 아직도 땅 위에 네 품에 거느리고 있느냐' 이렇게 안부를 묻는 김씨에게 기억 속 고향 마을의 봄 맞아 풀린 강물, 햇살 따사롭던 물결과 그 속에 은성하던 물고기, 거기서 놀던 어린 친구들은 모두 한 생명붙이다.김씨가 14회 개인전 '생명의 노래'를 26일부터 4월 18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연다. 1990년부터 줄곧 '생명의 노래'를 주제로 작품전을 열어온 그가 5년 만에 신작 50여 점을 새로 선보인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놀던 기억, 그 물결과 햇빛을 선의 에너지로 표출해보고 싶었지요." 김씨의 이번 작품들에서는 특히 물의 기운을 필획의 기로 풀어낸 점이 눈에 띈다. 마치 '주역'의 팔괘를 쓱쓱 그려놓은 듯 화면에서 물살이 일렁이고, 그곳에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물고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한 자락 먹선으로 표현돼있다. 생명의 약동과 여유로운 해학이 함께 있다.
때로 그 주위를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기도 하다. 나비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리게 한다. 꿈 속에서 나비가 되어 노닐다 꿈을 깨니,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분간 못하겠다던 장자의 꿈. 김씨의 그림에서도 장자가 나비꿈으로 말한 물아일체의 심경이 드러난다. 그의 그림은 추상처럼 보이면서도 뜯어보면 분명한 이야기가 있는 구상이다. 우리 문인화의 전통적 기법과 여유로운 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먹그림의 현대적 표현을 끊임없이 모색해왔다. 현대적이면서도 토착적이다.
그는 동양화의 전통적 바탕인 화선지를 쓰지 않는다. 닥 원료를 치자로 물들여 풀에다 반죽한 다음 미장질 하듯 판을 짜서 몇 겹씩 발라올린 닥판이 그의 캔버스이다. 그렇게 만든 누르스름한 화면은 마치 토장국 냄새가 풍길듯한 옛 시골집 토담, 세월의 때가 묻어 누렇게 변색된 장판지처럼 투박하면서도 정겹다. 그 위에 소위 골법용필(骨法用筆)과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동양화의 필법대로 강하고 거친 한 획의 붓자국을 남긴다.
15년째 '생명의 노래'를 주제로 한 작품을 계속해오는 데는 사실 끔찍한 계기가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89년 학교 가까운 고시원 방을 작업이 바쁠 때 잠이라도 잘 곳으로 쓸까 하고 구했지요. 첫날 하루 자고 났더니 어지럽더라구요." 사경을 헤매다 두 달 가까이 입원하고 퇴원한 그는 이후 생명이라는 걸 다시 보게 된다. 산길의 들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전까지 '바보예수' '흑색예수' 연작을 해오던 그의 작품세계는 "붓의 움직임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다"는 '생명의 노래'라는 주제로 집약됐다.
'아아 조선의 땅아, 바람아, 물들아/ 애잔하게 스러져 가는 것들아/ 오늘 서툰 붓 한 자루에 실어/ 내 너희 안부를 묻노니' 이렇게 이번 전시의 작가노트를 쓴 그는 미술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김병종의 화첩기행' 등 다섯 권의 책을 낸 필사이기도 하다. 서울대 미술관장도 맡고 있다. 전시문의 (02)720―1020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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