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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65>노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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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65>노발리스

입력
2004.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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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3월25일 독일 시인 노발리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29세였다. 요절은 모든 뛰어난 시인의 삶에 짙은 아우라를 들씌우지만, 그 당사자가 낭만주의자일 때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늙음과 낭만은 어쩐지 조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본명이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였던 노발리스는 시만이 아니라 소설, 에세이에도 손을 대며 자신의 짧은 문학적 생애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한 챕터를 채웠다.당대의 낭만주의 문인들이 대개 그랬듯 노발리스도 상류 계급 출신이었고,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는 하르덴베르크 남작으로 불렸다. 그리고 다른 낭만주의 문인들처럼 피히테의 관념론, 슐레겔 형제의 미학 이론,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철학 따위에 영향을 받았다. 예나 대학에 다니면서는 시인 실러로부터 직접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노발리스의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그가 죽기 세 해 전에 겪은 약혼녀 조피 폰 퀸의 죽음이었다. 철학적 신비주의가 또렷이 드러나는 일련의 시 '밤의 찬가들'만이 아니라, 노발리스의 작품 대부분은 그의 전기 작가들이 흔히 '조피 체험'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 뒤의 세 해 동안 쓰여졌다.

소설가로서 노발리스의 대표작으로는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이 꼽힌다. 주인공 하인리히가 내면으로의 긴 여행을 통해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이 미완의 교양소설은 '푸른 꽃'으로도 알려져 있다. 소설 속에서 푸른 꽃은 한 소녀의 얼굴과 포개지며 하인리히의 낭만적 동경을 북돋운다. 이 소설의 성가 덕분에 푸른 꽃은 그 뒤 낭만주의 문학의 한 상징어가 되었다. 중세의 신앙과 신정체제에 대해 짙은 향수를 드러낸 에세이 '기독교 세계 또는 유럽'을 포함해 노발리스는 모든 작품들에서 자연에 대한 감수성과 기독교 신앙을 끊임없이 뒤섞으며 '마술적 관념론'이라고 불리게 될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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