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를 얇게 도려내어 장식하는 나전칠기는 중국에도 일본에도 베트남에도 있다. 그런데 오래된 가구 유물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중국이나 일본을 봐도 나전칠기는 우리나라만큼 다양하고 화사한 기물이 드물다. 전통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전통 가구 중에는 나전칠기가 으뜸이고 나전칠기는 한국 것이 으뜸'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나전칠기의 재료가 되는 전복껍데기는 남해안에서 난 것이 색이 곱다. 뭍에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12공방이 있었고 물에는 오색영롱한 전복이 자라는 경남 통영은 그래서 일찍부터 나전의 고장이다.통영에는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 송방웅(64)씨가 있다. 지방에 있어선지 그는 서울의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에 나전칠기가 들어가는 요즘의 인기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구가 좀 잘 나가서 실컷 만들어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한테 나전일을 배웠다. 송씨의 아버지는 나전칠공 인간문화재였던 송주안(1901∼1981)씨. 일제는 한국 공예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자개가 유명한 통영과 옻칠이 유명한 평북 태천에 칠공예연구소를 세웠다. 주안씨는 통영칠공예연구소장과 태천칠공예연구소장을 지낸 나전칠공 분야의 명장이었다. 송씨는 "일본의 칠공예는 우리보다 100년은 앞서 있었지만 채화칠기가 중심이라 한국의 나전칠기를 보고는 독특함에 반해 한때 아버지와 김봉룡(인간문화재 1902∼1994)씨를 일본으로 불러 나전칠공을 가르치게도 했다"고 증언한다.
통영고를 졸업한 송씨의 꿈은 나전장이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아버지가 "이것도 예술이니 하라"는 말에 1959년, 나이 열아홉에 나전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벌써 45년. 그러나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봤으니 64년 했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가 40년에 그를 낳고는 태천칠공예연구소장으로 떠났다가 44년께 홀연 고향이 그리워 소장직을 사표 내고 돌아왔으니 그렇게 따지면 조금 빼야 하나. 허허 웃던 송씨는 "실은 박물관을 다니며 유물을 찾아보던 70년대부터 눈이 뜨였다"고 말한다. 숱한 나전칠기들을 보면서 어느 순간 "1미리의 차이로 가구의 안정감이 다르다는 게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했다. 그는 이때를 '미적 감각'이 싹튼 순간으로 잡는다.
비록 아버지가 주인이었지만 공방의 질서는 엄연했다. 초등학교를 나올까 말까 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선배들은 나이는 훨씬 아래였지만 후배를 아주 혹독하게 다뤘다. 그는 10년 동안 친구도 취미도 달리 없이 골방에 앉아 가르쳐 주는대로 일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처럼 공방만 지키다보면 고생만 하고 알아주는 이도 없겠구나"하는 자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안씨는 태천칠공예연구소장을 지내고서도 동년배들보다 한참 늦은 79년에야 인간문화재가 됐다.
그래서 시작한 박물관 나들이로 그는 안목이 트이고 그 안목으로 80년부터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작품이 전승공예대전에서 81년 82년 연거푸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83년에는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그 해에 그는 인간문화재 후보인 전수조교로도 지정됐다. 이 정도면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84년에 또 도전해 특별상을 받고 85년에 도전해 대통령상까지 받아낸다. 대단한 고집이다. "나전칠기가 전통예술의 최고인데 대통령상을 받아야지, 안 그렇습니까"하고 송씨는 웃는다.
그는 90년에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나전칠공 분야의 이름까지도 바꾸게 했다. "나전칠공은 무형문화재 10호 나전칠기장과 54호 끊음질장으로 구분돼 있었습니다. 끊음질이 비록 전통에 맞는 나전칠공의 기술이라지만 끊음질만 한다고 나전칠기가 됩니까. 장인이면 끊음질 줄음질 다 할 줄 알아야지요. 그래서 제가 나전장이 맞다, 고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현재는 10호 나전장으로 통일이 되어 있다. 나전장은 현재 두 사람인데 문화재청에서는 여전히 그는 끊음질의 명수로, 다른 한 사람인 이형만(58)씨는 줄음질의 명수로 구분하고 있다.
끊음질과 줄음질은 자개를 붙이는 기술이다. 끊음질은 톱으로 얇게 편 자개를 상사칼로 톡톡 끊어붙여서 무늬를 내는 것이고 줄음질은 자개를 실톱으로 그림대로 오려서 무늬를 만드는 기법이다. 실톱으로 자개를 오리기 시작한 시기가 일제 이후라는 점을 들어 줄음질은 전통 양식이 아니라는 논쟁도 있었으나 송씨는 "자개를 얇게 자르는 기술이 없었던 고려시대에는 두꺼운 자개를 두드려 깨서 붙이는 타발법을 썼다"며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장인이라면 어떤 방식이든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전칠기는 우선 백골(나무 가구)을 짜고 백골 위에 칠을 여러 번 한 후에 자개를 붙이는 데서 시작한다. 끊음질로 할 때는 먼저 판에 아교를 얇게 바른 후 따뜻한 수분을 주어 아교의 풀기가 살아나게 해서 그 곳에 자개를 붙인다. (줄음질은 자개에 아교를 바르고 인두로 붙인다.) 이때 따뜻한 수분을 주기 위해 송씨는 혀로 침을 바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붓으로 따끈한 물을 찍어서 하는데 그러면 수분의 양이 일정치 않고 물도 금방 식거든요. 옛날 방식대로 침으로 바르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나전장인은 아교를 서른말은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혀로 일일이 가구에 침을 발라가며 자개를 붙이니 1년이면 아교 한 말은 먹는 셈이란다. 그렇게 30년은 일해야 장인이 된다는 것인데 그는 45말은 먹었다는 지금도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든다고 했다.
아교로 자개를 붙인 후에는 칠을 다시 한다. 한번 칠하면 말리고 사포로 부드럽게 갈아낸 후 다시 칠하고 말리기를 거듭해야 한다. 마지막에 사포로 자개 위에 덮인 칠을 갈아 무늬를 살려내고 칠은 광택을 낸 뒤 장석 등을 달아 가구를 짜맞추면 완성이 된다.
이 때 칠을 두 번 정도 해서 자개가 도드라지면 볼록자개(철凸형 자개), 칠을 열번 정도 해서 칠과 함께 자개도 갈아내 무늬를 평면이 되도록 하면 평면자개, 자개보다 칠을 더 두껍게 칠한 후 자개 무늬에 있는 칠을 걷어내면 오목자개(요凹형 자개)가 된다.
그는 나전칠기의 핵심은 자개라고 했다. 자개를 잘 고르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도 끊음질이 숙달된 후에야 자개를 사러 다녔다. 자개를 사오면 물에 담가 보들보들하게 만들고 색을 보아 녹색을 가려낸다. 자개는 녹색과 청색 홍색, 3가지 색이 나는데 녹색이 가장 귀하다.
요즘 동남아산 자개가 많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는 오직 통영산 전복껍데기만을 쓴다. 동남아산이 색깔이 칙칙한 데 반해 우리나라 자개는 "오색영롱한 빛이 난다"고. 동남아산이 더 화려할 것이라는 통념과는 정반대다.
그는 전통장만 만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커다란 장롱에도 손을 댔지만 "너무 무거워서 전통 가구는 아니더라"며 "조선 토담집 온돌방에 어울리는 것이 우리 것"이라고 했다. 삼층장도 주문이 들어와야 맞추기에 그의 공방에 남아있는 가구들은 자그마한 보석함이 대부분이다. 크기는 작아도 영롱한 무늬가 장인의 솜씨를 자랑한다. 송씨는 "내가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들면 좋은 물건이 나온다"고 장인의 비결을 들려줬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 통영공예전수교육관
경남 통영시 무전동에는 지하 1층 지상2층 연건평 162평의 통영공예전수교육관이 서있다. 나전장 송씨가 91년 시의원이 된 후 전통공예의 보급과 대중교육을 위한 시설을 역설, 정부와 지자체 예산으로 94년 완공됐다.
통영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자리로 선조 때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의 제안으로 12공방이 세워졌다.
이 같은 전통 덕분에 전국에서 서울을 제외하면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나전장 말고도 4호 통영갓, 55호 소목장(전수조교) 64호 두석장 114호 염장이 여기서 나왔다.
그래서 이들의 공방을 한 군데에 만들어 일하기 편하게 하고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도 하자는 뜻에서 만든 것이 이 교육관.
하지만 당국의 지원 부족으로 현재는 나전장 송씨만 제자 3명을 가르치면서 이곳을 지키고 있다.
우선 기본 시절 자체가 열악하다. 공방마다 작업실이 예닐곱 평인데 휑뎅그렁한 빈방에 난방설비조차 없어 조금만 추워져도 작업이 힘들다. 10평 남짓한 공동 전시실 역시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이곳을 찾았다간 공방이 하도 옹색스러워서 전통 명품에 대한 인상만 낮아질까 걱정될 정도이다.
그나마 작년까지는 통영시에서 운영비가 나왔으나 올해는 그마저도 삭감된 상태이다. 송씨는 "전통공예를 시민들이 가까이하고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육관을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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