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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2> 가장 후회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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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2> 가장 후회하는 일

입력
2004.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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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가 되던 1941년 봄, 나는 중국에 갈 생각이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전시동원체제가 본격화할 때였다.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일본군에 끌려가면 전쟁터에서 죽으니까 살아 남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할아버지 서상무(徐相武)의 영향으로 장제스(蔣介石) 총통을 영웅으로 생각했고, 십구로군(十九路軍)이나 팔로군(八路軍)의 활약상을 들었는지라 임시정부가 있고, 장 총통이 있는 중국을 선망했다. 조부께서는 묘향산 남쪽, 대동강이 십리 거리에 있는 평남 덕천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해 평안협동조합 초대 회장을 지내실 정도로 개화한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와 종로 YMCA에서 4개월 여 동안 중국말을 배웠다. 낮에는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하므로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미스코시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다. 당시 설탕은 배급제였다. 배급표를 가져오면 저울로 달아서 나눠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설탕을 많이 먹다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치질 기미가 있었는데 설탕을 많이 먹은 후 곪아버려 경성부립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3주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오후 퇴근 시간에 치료비도 없이 입원한 나를 무료로 수술해주고 격려해주었던 외과과장 신태욱(辛泰郁). 그 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해방 후 5, 6년 지나 그 분을 찾았으나 소식을 알 길이 없어 지금도 신세를 갚지 못하고 있다.

고민이 많은 청춘이었다. 한번은 우리나라에서 관상을 제일 잘 본다는 배상철이란 분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만주국 정부 관리로 국장까지 한 사람인데 직업적 관상쟁이가 아니라 뜻이 있는 지사로 알려진 분이었다. 그는 나의 고민을 경청한 뒤 서기를 시켜서 긴 관상평을 써주었다. '나는 용이 구름을 타니 만백성이 우러러본다(飛龍乘雲 蒼生仰視)'는 첫 구절이 뜻밖이었다. 고향을 떠나 먼 나라로 가야 한다, 스무 살에는 매우 큰 불운이 닥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유명한 문인이나 언론인을 많이 찾아 다녔다. 작가 이태준(李泰俊)을 성북동 집으로 두 번 찾아갔었고, 매일신보 주필 서춘(徐椿),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양재하(梁在廈), 삼천리사 사장 김동환(金東煥) 등을 찾아가 내 흉중의 고민을 얘기했다. 그 중에 인상에 남고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준 분은 양재하와 이태준이었다.

몸도 많이 쇠약해져 8개월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중국행을 망설이면서 한 달여를 보냈을 1941년 10월 초순 나는 일본 경찰에 덜컥 잡혀갔다. 배 선생의 관상평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무렵 사상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그 중에 판금(販禁) 불온서적이 있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내게서 책을 빌려다 보고 다른 사람에게 돌렸던 고모부를 미리 구금해, 처조카인 내가 조부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꾸몄다는 자백을 받아두고 있었다. 나는 큰 혐의를 받고 옆 군(郡)의 영원경찰서에 구금이 되어 9개월 반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나에게 소위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이상의 과장된 자백을 강요했다.

평양형무소로 이감된 뒤 모리(森)라는 유명한 사상검사에게 다시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 경찰에서 고문 당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과장된 부분은 부인했다. 국가보안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7, 8년간 감옥에 있을 만한 죄를 지었는데 아직 미성년라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작년 10월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와 북한의 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회의 참석차 방북했을 때, 역사연구소 관계자가 조부의 협동조합 운동과 내가 일경에서 겪은 고초를 알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용기가 없어 중국으로 탈출하지 못한 것이 내 평생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하든 탈출했더라면 내 사상으로 보아 장 총통한테는 못 갔더라도 광복군에는 들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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