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의장, 오래간만입니다.한달 전 진보진영의 거목이신 고 김진균 교수의 민주사회장과 관련해 공동 장례위원장인 제게 조문 전화를 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절규하는 정 의장의 모습을 보면서 대학 시절 함께 데모하던 시절이 생각나 착잡했습니다. 그러나 탄핵이라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자살골로 인해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니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지난 주(16일자) 이 난('자폭의 정치')에서 지적했듯이 한나라당은 그 동안 노 대통령의 시민혁명 발언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해 왔지만 엉뚱하게도 자기들이 시민혁명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광화문 등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탄핵 무효, 부패정치 심판, 민주개혁 완수'를 위한 촛불시위가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집회에 대해 경찰은 야간집회를 사실상 금지하는 집시법을 어긴 불법 집회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일단 집회는 막지 않고 나중에 주최자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 의장은 경찰의 불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는 "자발적이고 민주적 의사표현 방법"으로 "어떠한 불법도 위법도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즉 현행법으로 볼 때는 불법일지 몰라도 헌법 정신에 따르면 불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 의장의 발언을 듣는 순간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총선시민연대는 이번부터 실시되는 정당투표와 관련해 정당 평가를 하고 있는 바, 저는 공동대표로서 쟁점 법안들에 대한 각 당의 투표 실적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과 정 의장의 발언이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들의 집회와 시위에 대한 권리를 확대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대폭 축소하여 사실상 거리집회를 불가능하게 만든 개악안을 국회에 상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집시법이 아니라 집시금지법인데 여기에 정 의장이 찬성표를 던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시민단체들이 위헌적인 개악이므로 불복종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한 악법인데도 정 의장은 정형근, 김용갑 등 95명의 한나라당 의원, 김옥두 등 22명의 민주당 의원, 강봉균, 송석찬, 정세균 등 11명의 열린우리당 동료 의원과 함께 찬성 투표를 해 집시법 개악에 일조했습니다.
저는 차세대 선두 주자인 정 의장 같은 정치인이 이런 악법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수적 견해도 개인적 신념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 줄 수 있고, 다만 국민이 표로 평가할 문제입니다.
정작 문제는 집시법 개악안을 지지하고도 탄핵 반대 시위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 의장의 이중적 사고입니다. 한마디로 일반 국민의 집회와 시위 권리는 더 제한해야 하지만 열린우리당에 유리한 집회와 시위는 불법이라도 합법이라는 주장에 다름 아닙니다. 사실 이 점에서는 정 의장뿐 아니라 노무현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 집시법을 개악할 때는 언제이고 이번 시위에 대해서는 국정홍보처장 등이 "불법 집회라 하더라도 모두 불법 행위로 간주해선 안된다"느니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일이 차기 대권 후보 1순위로 거론되는 정 의장의 정치적 미래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집시법 개악에 찬성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17대 국회에서 집시법을 민주적 방향으로 재개정하도록 주도할 것을 약속해 주기 바랍니다. 정치인도 인간인 이상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큰 정치인은 잘못을 시인해서 고치고, 이를 통해 성숙해진다는 점에서 정상배들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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