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은 인삼을 '고려의 정신'이라고 노래했다. 인삼이 갖는 이미지를 잘 짚어낸 표현인 것 같다. 고려인삼의 성가를 드높인 주역은 개성상인, 이른바 송상(松商)이다. 송도삼업(松都蔘業)은 남한에서 송상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업체라고 해도 틀림없다. 인삼장사로 부를 축적한 개성사람들은 많아도 대를 이어 삼업에 재투자한 사람은 송도삼업의 창업자 고 홍순호(洪淳浩)옹 정도다. 송상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남달랐던 홍옹은 삼업의 계승·발전을 유훈으로 남겼다. 고인은 생전에 사업방향을 두 갈래로 분리, 수출을 전담하는 '진흥삼업'은 큰 아들 홍인표(洪仁杓·65), 내수전문인 '송도삼업'은 조카인 홍광표(洪光杓·64)씨에게 맡겼다."스위스하면 시계, 프랑스하면 포도주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듯이 인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품입니다. 고인은 한국인삼의 성가를 부활시키고 송상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삼업을 되살리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국인삼사'를 엮은 '고려인삼포럼'의 양재형(梁在亨·77)회장은 홍옹을 그렇게 평가한다.
"삼업계는 현상황을 최근 100년 동안 최대의 위기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인삼종주국의 명성이 흔들린 지는 오래됐고 사업의 장래성도 불투명합니다." 홍광표사장의 한숨 깊은 토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인삼시장의 40%를 한국산이 차지했지만 2000년에는 채 5%도 안될 정도로 폭락했다. 홍콩시장의 경우 미국 중국산이 시장을 좌우한다. 이는 원료삼 생산기반의 붕괴, 유통구조의 후진성, 수출전략의 부재 등 여러 요인이 겹쳐 발생한 현상이다.
송도삼업은 종로구 관철동 266, 5층 건물의 지하, 진흥삼업은 5층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소비자를 상대로 한 영업을 중단한 뒤 매장도 지하로 내려왔다. 송도삼업은 97년 전매제도 폐지 후 백화점에만 납품하고 있다. 90년대 초만해도 서울의 백화점 대부분을 고객으로 확보했지만 이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업영역이 크게 줄어들었다.
개성이 고향인 창업자 홍옹은 전형적인 송상이었다. 89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삼업계의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전히 존경을 받는다. 오로지 근검절약으로 가난을 딛고 과수원을 일궈 인삼농사의 토대를 닦았다. 정규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사리에 밝았고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일단 '틀림없는 사람이다'고 판단이 서면 아낌없이 도와주었고 그의 지원으로 성공한 사람이 여럿이다.
한국전쟁 직전 월남한 홍옹은 인삼농사를 재개, 한국인삼공사(당시 전매청)에 납품하다가 유통사업에도 뛰어들었다. 63년 '고려인삼진흥'을 창업, 한약방은 물론 일반인을 상대로 팔기 시작했다. 삼포(蔘圃·인삼밭)는 포천 여주 이천 용인 등 경기도 일원에 마련했다. 신용과 양심이 그의 가장 큰 자본이었다.
서울시영농인삼판매조합 김성태(金成泰·74)조합장은 고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30년 가까이 된 이야기 입니다. 하루는 사업에 실패해 알거지나 다름 없던 저를 부르시더군요. 저를 무척 성실하게 보신 모양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장사에 필요한 돈이 얼마야'라고 묻더니 1억5,000만원을 건네주시더군요. 한 푼의 이자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뒤에 '이왕이면 개성사람을 도와주지 그랬느냐'고 고인에게 섭섭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부여가 고향인 그는 고인의 지원으로 인삼농사를 다시 시작했고 재기했다.
홍광표사장은 1·4후퇴 때 작은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왔다. 고향에 남은 부모 대신 작은아버지 부부를 부모처럼 모셨다. 제대한 뒤 화가의 꿈을 접은 홍사장은 작은 아버지를 도우면서 백화점 등 대형거래처를 개척했다. 외상금지는 창업자의 철칙 중 하나였다. 홍사장은 원칙을 딱 한 번 어겼다. 70년 서울역 앞에 대형 여행사 5곳이 공동으로 인삼매장으로 차렸다. 당시 일본인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높던 특산품은 인삼이었다. 그 매장에 투자한 친구가 자금이 달리자 외상을 호소했다. 무려 1억원어치를 외상으로 대주었다. 작은 아버지 몰래 외상을 주고 덜컹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4년간 거래하면서 약속을 어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의 사촌형 인표씨는 74년부터 수출에 힘써 삼업계 최초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쌀농사로 치면 '증산왕'에 해당되는 상이었다. 70년대 주거래처는 스위스의 제약회사 파마톤이었고 80년대 한때 포천에 공장을 세워 다국적 기업인 독일의 제약회사 베링거 인겔하임에 의약품 원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흔히 인삼농사는 자식농사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애를 키우는 심정으로 길게는 6년, 짧게는 4년 동안 온갖 정성을 쏟고 마음을 졸여야 한다. 더구나 인삼농사는 연작이 안 된다. 한번 수확한 밭은 최소한 10년 이상 지나야 지력이 회복된다. 홍사장은 언젠가 수확한 지 15년이 지난 밭에 인삼을 다시 심었다. 6년 뒤 1만8,000평의 삼포에서 거둔 수확량은 승용차 1대분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흉작이었다. 송도삼업은 현재 정읍 신태인 김제에 삼포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 고래로 인삼의 나라로 불려왔다. 송상의 후예 홍광표사장은 가업을 지키는 것이 인삼종주국의 명성을 되찾는 길임을 굳게 믿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인삼재배법 고려시대 개발 가공따라 백삼·홍삼 다양
송상은 개성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상인을 일컫는다. 특히 조선후기 개성의 사상(私商)들은 전국을 연결하는 조직적 유통망을 구축, 거대한 상업자본을 축적해갔다. 인삼과 갓 등이 부의 원천이었다. 개성상인은 최대의 삼상(蔘商)이었다. 특히 청나라와의 무역에서는 만상(灣商)으로 불리던 의주상인들과 연대, 인삼 가죽 종이 등을 수출했다. 송상은 축적된 자본을 인삼재배와 가공업에 투자했다. 이에 따라 개성에는 삼포가 급격히 확장됐고 인삼재배와 가공업이 동시에 발달하게 됐다.
문헌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인삼재배법은 고려시대 개발됐다. 왕실과 귀족은 물론이고 중국의 요구로 자연삼의 수요가 폭증했고 왕실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백성에게 부담을 지워 삼폐(蔘弊)라는 원성까지 자아냈다. 삼폐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연삼을 인공으로 재배하는 방법이 개발됐다. 인삼의 본격적인 대량 재배는 16세기 들어서다.
인삼은 4∼6년 된 삼의 총칭이다. 수삼은 밭에서 캐낸 자연상태의 삼을 말한다. 백삼은 수삼의 껍질을 벗겨 햇볕이나 열에 말려 제조한다. 홍삼은 수삼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증기로 쪄서 만드는데 붉은 빛깔에 몸통이 야무지다. 6년근 수삼 한 뿌리의 무게는 보통 150g 안팎이다. 1평이 채 한되는 삼포 한 칸의 수확량은 작황이 가장 좋을 경우 4kg정도 된다. 널리 알려진 정관장(正官庄)은 한국인삼공사가 6년근 수삼을 원료로 제조한 홍삼의 브랜드다.
6, 7월에 삼딸(인삼열매)에서 채취한 씨를 묘포에 뿌리는 파종시기는 보통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 사이다. 2년째 되는 해 3월에 묘삼을 채취한다. 종삼이라고도 불리는 묘삼(苗蔘)은 콩나물 굵기 정도 크기인데 대개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 본포에 이식한다. 이식과정을 거치지 않고 씨를 뿌려 그대로 수확하는 직파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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