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대통령 탄핵을 결의한 지 열흘이 지났다. 경악하던 민심은 서서히 진정되고, 이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그러나 탄핵을 화제에 올리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탄핵에 대한 견해 차이로 싸움이 벌어질 위험이 높다. 직장 동료, 동창, 친지, 가족 등 그 어떤 모임도 안전하지 않다.
탄핵논쟁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면 부르르 치를 떠는 격렬한 반응부터 나온다. 당신은 으레 그런 사람이지 라는 멸시, 설마 당신이 그 편인 줄 몰랐다는 반감 등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이제 촛불 시위를 끝내야지 언제까지 사회를 시끄럽게 할 거야"라고 부모가 말한다. 자녀들은 "국회의 만행에 대해 시민들이 그 정도의 저항도 안하면 죽은 사회죠"라고 받는다. "국회가 합법적으로 한 탄핵결의는 만행이고, 불법적인 촛불시위는 시민항거냐?"라고 부모가 소리지르면 단란한 저녁 식탁은 파장을 맞는다.
"촛불시위 때문에 차가 밀려서 늦었어요. 정부가 불법시위라는 결론을 내렸으면 강력하게 단속해야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건가요? 촛불시위를 그냥 둔 채 공명선거 운운하면 국민이 정부를 믿겠어요?"라고 모임에 늦게 온 한 참석자가 말한다.
"야당들이 한 짓에 비하면 촛불시위는 너무나 점잖은 거예요" 라고 누군가 받는다면 모두가 긴장해야 한다. "탄핵을 자초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인데 일방적으로 야당만 성토할 수는 없지요"라고 이어지면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야당이 감히 누구를 탄핵합니까. 온갖 파행과 부패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 온 의원들이 노 대통령을 어떻게 탄핵합니까. 그건 쿠데타지요."
"나는 탄핵사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노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확고한 준법의지가 없어요. 문제가 터지면 일단 사과하지만 뒤이어 변명을 들어보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안 보여요. 항상 상대방이 더 부패하고 더 나쁘다는 식이죠. 대통령의 준법의지 결여는 매우 위험한 거죠."
"현미경을 들이대고 찾으면 누구나 죄가 나오겠지요. 그런 정도의 죄로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정치가 깨끗해지는 날이 빨리 오기를 나도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죠."
사실은 탄핵논쟁이 이 정도로 길게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서로 한 두 마디 던지다가 "아 너는 친노구나" "아 너는 반노구나"라고 결론을 내리며 입을 다물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탄핵 갈등으로 갈기갈기 찢겨있다. 곳곳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로 다투며 모두가 상처를 입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지역감정이 약화한 것 같지만 이념, 계층, 연령, 지역 등의 요소가 얽혀 있다. 적이냐 동지냐의 분류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서 주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 온 관계가 싸늘해 진다.
그러나 이 사태를 잘 넘기면 우리가 한단계 성숙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갈등과 대립이 심할수록 그것을 법과 양식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훈련을 할 수 있다면 이번 사태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헌재 출석이 매우 중요하다. 헌재는 오는 30일 첫 공개변론에 대통령 출석을 요청했고, 청와대는 대통령 본인의 출석이 의무사항은 아니라고 밝혔다. 또 야당들은 대통령을 직접 신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헌재에 나가서 법에 따라 탄핵사태를 빨리 마무리하려는 겸허함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지만 탄핵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국민과 화해해야 한다. 그 화해가 탄핵이후 노 대통령 행보의 첫걸음이 돼야 한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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