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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증평 "무등산광장" 식당 연동진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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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증평 "무등산광장" 식당 연동진씨의 삶

입력
2004.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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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은 산 높고 계곡 깊은 충북에서도 유난히 산수가 수려한 곳이다. 첩첩이 둘러쳐진 두타산, 삼보산의 연봉이 오롯이 감싸 안은 듯한 지세이되, 작지않은 들이 산재해 궁벽치 않게 자족하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다. 어찌 보면 은자(隱者)나 도인(道人)의 고장 같다고나 할까. 예로부터 명리를 크게 얻은 이들보다 아름다운 품성의 선비, 열부가 유독 이 곳에 많았던 것도 이런 자연조건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연동진(延東振·42)씨도 그런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이 곳의 식당 '무등산광장'의 대표다. 말이 식당이지 예사로운 식당이 아니다. 산 기슭 깊숙한 곳의 1만5,000평 드넓은 터가 그렇고, 고풍스러운 한옥과 뜰을 가득 메운 온갖 조형물들이 그렇다. 무엇보다 놀라운 규모의 이 모든 것들이 순전히 그 혼자의 손끝으로 이뤄낸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리 지나온 세월에 언제 바람 잔 날이 있었으랴마는 요즘 바람은 너무도 거칠고 산란해 제 몸 하나 가누기가 힘들다. 이럴 땐 세속을 비껴난 이의 삶이 홀연히 그리워지는 법. 연씨를 만나보기로 한 것도 그런 연유다.

청주에서 증평 읍내로 가는 국도를 설핏 빠져 굽고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이런 곳이 예 있으랴 싶게 돌연 높직한 한옥이 가로 막아 선다. 삼보산 자락을 등지고 앉은 '무등산광장(無騰山廣場)'의 본채다. 한옥 한 채로는 대단히 큰 150여평 규모에 3층이나 되는 높이다. 올려다보이는 자태가 자못 거창하다. 섣부르게 현대적 감각을 더해 지은 한옥이란 자칫 천박해지기 십상. 하지만 날아갈 듯 치켜 올려진 처마에, 단청 대신 기름먹인 목재가 오랜 풍상의 흔적처럼 퇴색해 제법 자태가 고아하다. 입구에 붙은 '모범음식점' 명패가 도리어 생경하다. 문간 안쪽의 작은 연못을 건너 들어가 본 내부 분위기는 어둑하면서도 자못 기이하다.

온갖 괴목을 깎고 다듬은 갖가지 모양의 상과 조각(계단의 난간은 남근 모양이다. 이 곳의 승한 음기를 누르기 위해서란다), 선반 따위가 손님들을 맞을 필요공간만 남기고 꽉 들어찼다. 만만치 않은 규모의 전시장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이다.

그 뿐이랴. 집을 둘러 한점 한점 쌓아올린 돌탑이 200여 개나 되고 1,000점이 넘는다는 분재와 수석이 온실과 뜰 안팎을 가득 메웠다. 뒤쪽으로는 널찍하게 파인 연못을 가로질러 철제 구름다리가 놓인 끝에 팔각정이 앉았고 옆에 큰 물레방아가 섰다. 한 켠에는 현대식 정자 모양의 방갈로들이 한창 골격을 갖춰가고 있고, 더 깊숙한 산 쪽으로는 청주의 철거되는 고택(古宅)을 해체해 옮겨오기 위한 집터가 닦였다. 게다가 구석에는 개나 새 따위를 키우는 큼직한 사육장까지 갖췄다.

글쎄, 순전히 미학(美學)적 관점으로만 보면야 본채와 뜰의 시설물들이 재질이나 주제에 다소 일관성이 없는데다, 아무래도 정교하게 계산된 배치가 아니어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더구나 본채를 제외한 뜰 이곳 저곳은 아직 어수선한 공사판과도 같다). 설사 그렇더라도 그 때문에 이 곳을 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것 하나 연동진씨 혼자 힘으로 이뤄지지 않은 게 없으므로.

목재를 구해 운반하고 깎고 다듬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 서까래를 얹고 지르고, 벽을 잇고 또 그 위에 기와를 덮고 내부를 칸칸이 구획지어 장식물들을 만들어 들이고… 용접을 하고 돌과 목재를 주물러 조각을 하고… 그런가 하면 분재를 하고 수석을 찾아 모아들이는 일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마냥 고행하듯 일해온 게 벌써 꼬박 8년이다. 게다가 '무등산광장'의 조성은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1만5,000평 대지가 연동진씨의 구상대로 다 짜여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심지어 요리를 하고 손님에게 내는 일까지도 온전히 그의 몫이다.

언뜻 문외한의 눈에도 이런 엄청난 노력과 결과물이 도무지 장사 속과는 무관해보인다는 데는 더더욱 이해가 닿지않는다. 위치부터가 그렇다. 차들이 다니는 큰 길(그래 봐야 이 곳은 원래 인적이 많지 않은 곳이다)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거니와 농로도 들어가는 초입도 웬만큼 눈 밝은 이가 아니면 지나치기 일쑤다. 그 곳에 입간판을 걸었으나 유객(誘客)보다는 배려에 가깝다. 그래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이들이 꽤 많다는 데도 상차림 돕는 종업원이라야 딱 한명 뿐이다. 그러니 손님이 없을 때는 마치 고즈넉한 산방에 앉은 느낌이다. "그냥 일하는 게 좋아서 몰두하다 보니까 예까지 온 겁니다. 돈 벌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지요." 하긴 방갈로의 흙벽을 바르다 툭툭 털고 나와 그 차림새 그대로 손님을 맞고 주방을 들락거리는 그의 모습에서 영악한 장사꾼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노동의 즐거움을 좇는 삶, 그게 연씨가 사는 방식이다.

'무등산광장'을 시작하기까지의 연씨 이력은 꽤 파란만장하다. 그는 이 곳에서 가까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원래 꿈은 화가였지만 그 시절 넉넉지 않은 살림에 생계 불투명한 길을 부모에게 설득한다는 게 쉬운 일이었을까. 대신 웅변으로 전국대회를 휩쓸며 나름대로 화려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청주상고를 졸업도 하기 전에 외환은행에 취직이 돼 상경했으나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6년여 만에 은행원 생활을 접고 홍익대 미대에 진학했다. 90년에 졸업하고는 고향에 내려와서 미술과 웅변 등을 가르치는 학원을 열었다. "아이들의 품성을 바르게 키워주고 싶었는데 학부형들의 생각은 그게 아닙디다. 당장의 실적을 필요로 하더라구요. 돈 주고도 살 수 있는 그깟 상장이 뭐라고. 회의가 밀려와 3년 만에 후배한테 돈 한푼 안 받고 그냥 학원을 넘겨주었지요."

그 뒤로는 레스토랑도 했고, 조경업에도 손을 대 제법 크게 일을 벌였으며 애완견도 한 1,000마리 쯤 키워봤다. 건설기계부품을 다루는 중견 사업체를 세워 괜찮았는데 동업을 하던 친구가 그의 돈 계산을 의심한다는 말을 들었다. 제 지분까지 몽땅 다 주고는 나와 버렸다. 매양 이런 식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훌훌 손을 털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은 늘 맨손이었다.

'무등산광장'은 그런 과정을 거친 뒤인 96년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미술공부에다 은행업, 음식점, 조경업, 건축사업까지 다 해보았으니 현실적으로는 그의 모든 경험을 총합하는 일이기도 했다) 고향 근처에 보아둔 땅을 뜻하지 않은 헐값에 얻었다. 무등산광장이란 이름은 꿈 속에서 어떤 할머니가 준 것이라고 했다. 남을 썼으면 지금까지만 해도 10억원 이상 들어갔을 공사 규모지만 자재를 구하는 일서부터 혼자 한 덕에 1억7,000여만원 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본채가 완공된 2000년 개업한 뒤로 오리와 닭요리가 주종인 음식 맛에다 건물도 소문이 나 찾는 손님이 적지 않지만 거의가 공사비로 들어갈 뿐이다. 그나마 지난 연말부터는 조류독감 탓에 손님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연씨는 별로 개의하는 표정이 아니다.

"욕심을 버리고 그냥 물 흐르듯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거지요. 그러면 행복합니다. 새벽 두, 세시까지 일을 하다 아침 7시면 어김없이 눈을 떠 또 나무를 깎고 대패질을 하고 삽질을 하고 망치를 두드리고… 몰입해 일을 하다 보면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됩니다. 시간 가는 줄 몰라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내와 6살짜리 아들이 사는 읍내 집에는 한달에 두어번 정도나 들른단다)" 그에게 노동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구도(求道)의 길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렇게 한 3년쯤 더 하면 그런대로 제가 구상했던 만큼 갖춰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나면 사심없는 이에게 넘겨줄 작정입니다. 다 털고 떠나서 또 다른 삶을 찾아가야지요."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글쎄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바람처럼 떠돌아다니기도 하면서… 뭐 그렇게 살지요." 제멋대로 내버려둔 머리카락과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웃는 모습은 티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연동진씨는

이야기 말미에 오래 전 혼자 전국의 산을 떠돌 때 지리산에서 만난 기연(奇緣)을 소개했다. "눈 덮인 산을 오르다 조난을 당해 찾아 든 암자에서 노스님과 한동안 생활했었지요. 여러 번 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한번은 뜻밖에 술을 권하시더라구요, 잔에 넘치도록 계속 술을 붓길래 의아해 했더니 말씀하십디다. '넘치면 마시지도 못하면서 상만 더럽히고 방바닥을 버릴 뿐이다. 늘 넘치지 않게 채우되 차면 미련없이 비워라.'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삶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이는 뜻밖에 주변 어디에나 있는 법. 그 선승처럼 연씨 또한 그런 이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내내 그의 삶이 화두처럼 머리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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