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문학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호손의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를 광복 후 처음 번역한 최재서는 "호손의 소설은 세밀한 심리묘사에 있어 세계 제1류이며, 영혼의 미묘한 동태를 추구함에 있어 실로 독보"라고 평하고 이런 호손의 "예술을 살릴 수 있을는지 참으로 아득하다"고 썼다.미국 식민지시대 초기 젊은 목사 딤즈데일과 유부녀 헤스터 프린의 불륜의 사랑과 진실, 허위의식이 뒤섞인 미묘한 심리를 정교한 언어로 묘파한 이 작품이 번역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광복 후 출간된 '주홍글자'의 수많은 판본 가운데 그의 번역이 가장 나은 것은 이런 감식안과 책임감 덕분이 아닐까.
검토한 70개 판본 가운데 추천할 만한 것은 최재서의 초역본(1953년)과 이장환의 역본(1961년) 정도이고, 39종이 표절본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초창기 역자들의 성과를 1970년대 이후에 쏟아져 나온 역서들이 제대로 물려받지 못하고 오히려 개악한 점이다. 표절이 난무한 현상은 이런 현상과 동전의 양면이랄 수 있다. 어구와 표현을 약간씩 바꾼 위장 표절본을 다시 표절한 '표절의 표절', 여러 판본을 짜깁기한 '잡종의 표절'까지 생겨났다.
오식이나 오역의 대물림이 표절본 뿐 아니라, 꽤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는 판본들에서 빈번한 것도 심각한 문제다. 가령 김종운의 역본(1975년)은 최재서의 드문 오역 "이 세상 누구에 대해서나 진배없는 책임을 이 사람에 대해서는 지고 있다"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는 대략 "어느 누구에게도, 그 밖의 세상 전체에도 지지 않은 책임을 이 사람에게 지고 있다"의 뜻이다.
작품의 핵심부분에서는 사소한 실수가 치명적일 수 있다. 양병탁 역본(1973년)의 "헤스터의 표정에 나타난 대리석과 같은 냉정함은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그녀의 생활이 정열과 감정이라는 것에서 사색에로 크게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에서 '환경'은 'circumstance'의 역어인데, '주변환경'의 뜻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헤스터의 대리석 같이 차가운 인상은 상당 부분 그녀의 삶이 정열과 감정으로부터 생각으로 크게 전환한 사정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정도로 옮겨야 뜻이 명확해진다.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왜곡한 경우도 있다. 특히 여주인공을 옹호하려는 역자의 경우 이런 실수가 잦다. 가령 "마음씨 고약한 거지 따위는…욕지거리를 퍼붓는 일도 있었지만 그녀는 못들은 척했다"(오국근)는 대목에서 "욕지거리를 퍼붓는 일도 있었지만"은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threw back a gibe) 정도이며, "그녀는 못들은 척 했다"라는 구절은 역자의 순전한 첨언이다. 대다수 역자들이 '주홍글씨'로 잘못 옮긴 제목과 생략한 서문 '세관'(The Custom-House)을 온전하게 되살려야 함도 두말할 나위 없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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