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신문에서는 온통 탄핵이야기만 해요? 왜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하고, 왜 그렇게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예요?"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가 나와 번갈아 쓰고 있는 일기장에 써 놓은 질문이다. 이 아이의 질문에 나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에 기록될 탄핵사태에 대해 우리는 후세들에게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이 질문에 나는 간단하게 답하고 싶다. 대통령 탄핵은 국민의 뜻을 무시한 것이므로 많은 국민이 반발하고 있고,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한 것이라고. 그러나 이 어려움을 잘 이기고 극복하면 더 나은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탄핵안 가결이후 매일같이 열리는 자발적 촛불집회에서 나는 우리 국민의 뜻과 의지를 읽는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서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민주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읽는다. 그곳에서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본다.
역사는 반전을 통해 발전한다. 우리 현대사의 굵은 획을 그었던 사건들을 뒤돌아보면 민주와 인권을 향한 발전 앞에는 으레 견디기 어려운 부정과 부패가 있었다. 3·15 부정선거 뒤에 4·19 혁명이 있었고, 유신말기의 극악한 인권탄압 뒤에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었다. 또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뒤에 6월 민주항쟁이 있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번 탄핵안 가결 이후에도 역사발전을 가져올 희망의 씨앗은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탄핵을 주도한 야당은 이 희망의 싹을 짓밟으려 또다시 납득하기 어려운 짓들을 하고 있다. 방송사의 촛불집회와 여론조사 결과 보도가 편파보도라며 기계적 중립을 요구하였단다. 이는 군사독재정권시대에 있었던 보도지침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기계적 중립이란, 열 사람 중 일곱 사람은 탄핵에 반대하고 세 사람은 탄핵에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는 감추고,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각각 한 차례씩만 보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시청자로 하여금 찬성과 반대가 똑같은 것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사실의 왜곡이 발생하는데, 야당은 이 사실의 왜곡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중립을 지키겠다고 침묵하면 힘센 자에 대한 동조를 낳는다. 과거 종교인들이 정교분리를 강조하면서 군사독재정권에 대해서 침묵한 결과는 결국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을 묵인하고 동조한 결과를 낳았다. 탄핵안 가결에 대해 침묵하면 또 가결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혹자는 찬반양론을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다. 국민들이 광화문네거리에 자발적으로 모이는 것은 그들의 주권이 합법을 가장한 방법으로 유린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은 인권을 탄압하고 정권을 유지할 때 갈수록 합법의 방법을 동원하는 세련됨을 키워왔다. 국가보안법을 동원하고 집시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으려고 해왔다. 탄핵안 가결도 합법을 가장한 세련됨의 극치가 아닌가? 그러나 모든 권력의 근원적 주인인 민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나는 이번 탄핵안 가결이 국회의원들이 가진 것이 너무 많은데다가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존재에 의해 의식을 규정 당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민중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그럴 때만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탄핵안 사태를 통하여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참 민주와 역사발전의 의미를 생생하게 깨닫게 되기를 기대한다.
최 일 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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