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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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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입력
2004.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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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형 옮김 문예출판사·2만5,000원

"나는 두렵다. 옹골차지 못하고, 속이 텅 비었다. 내 눈동자 뒤에는 감각 없이 마비된 텅빈 동굴이 느껴진다. 지옥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실체를 흉내낼 뿐인 무(無)가 느껴진다. 나는 생각한 적이 없다. 글을 쓴 적도, 시련을 겪은 적도 없다. 자살하고 싶다. 무거운 책임을 훌훌 벗고, 비굴하게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도로 기어 들어가고 싶다.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1963년 2월 11일, 150년 만에 찾아왔다는 런던의 혹한 속에서 실비아 플라스는 옆방에 세 살 과 두 살짜리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우유를 챙겨놓고 수면제를 먹은 다음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가스를 켰다. 당시 그녀의 나이 서른 살. 이로써 20세기 미국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천재 여류 시인의 삶은 참혹한 비극으로 끝이 났다.

7년 전 아름답고 재기발랄한 미국의 시인 지망생과 당대의 대표적인 영국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은 영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맨스가 되었지만, 플라스는 결국 남편의 외도로 인한 별거 후, 생활고와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플라스의 죽음은 그러나 그녀가 일반 독자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한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막 시작된 페미니즘과 맞물려, 플라스는 남성들의 오만과 횡포로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가치를 차단당한 여성의 고통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그녀의 대표시집 '에어리얼'이나 자전적 소설 '종 모양의 병'에 관한 문학적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가히 당대의 신화적 인물로 부상한 그녀의 생애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지대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1986년 플라스 작품의 판권을 갖고 있는 남편 테드 휴즈와 프랜시스 매컬로우가 공동편집해 이 책을 출판했을 때 독자와 학계는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머리가 좋았으며 감수성이 예민했던 플라스는 열한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 그러나 이 책은 그녀가 스미스대학에 입학하는 1950년부터 장학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던 중 테드 휴즈와의 결혼,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스미스대학 영문학 강사로 재직하다가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살하기 몇 달 전까지의 삶을 기록하고 있고, 이는 그녀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에 해답을 제공한다.

한 비평가가 '자신의 운명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한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라고 평했던 것처럼, 이 일기는 플라스의 천재성이 어떻게 외부의 장애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가에 대한 연대기이다. 자기파괴적일 정도로 극심한 자기 표출에 관한 열정, 시인으로서 사회적 성공을 하고 싶은 야망, 이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분노와 좌절 등이 무서울 정도로 솔직하고 신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덮으며 가슴에 남는 것은 한 천재시인의 거대한 욕망이나 어느 페미니스트의 위대한 순교라기보다는 혼돈 속에서도 작은 드라마 같은 하루하루의 삶의 기쁨과 절망에 온몸을 맡기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킨 한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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