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대통령권한대행체제에서 국정이 안정되고 있다. 무디스 등 신용평가기관들도 한국의 신용평가에 손을 대지 않았다. 주가는 다시 오르고 환율은 안정적이다. 헌정도 중단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다. 권한이 정지된 대통령이 청와대에 칩거하지만 나라에 별 탈이 없다. 탄핵정국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할 것이라고 한다.과연 그렇게 낙관적일까. 이것이 폭풍 후에 잠시 찾아 든 고요함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통령 탄핵은 여야에게는 제로섬 게임으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적으로는 아무래도 위기라 해야 할 것이다.
국론은 극도로 분열되고 있다. 학계 언론 시민단체나 그 구성원들이 두툼한 쿠션역할을 잃고 점점 정쟁의 대리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정치적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정파가 건전한 정책경쟁을 포기하고 지금처럼 감정으로 정쟁에 휩싸일 때 정치인들은 사활을 건 권력게임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세계를 바라보고 미래를 꿰뚫으면서 나라의 갈 길을 찾는 혜안을 가질 수가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전쟁으로 내일 어느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불과 한달 후면 우리 장병이 이라크로 떠나는 데 그들의 앞길에 무슨 일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중국의 경제팽창으로 국제경제질서에 어떤 변동이 올지 불안하기만 하다. 중동정세의 불안정과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 전략으로 국제유가는 얼마나 오를지 가늠할 수 없다. 시베리아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송유관 끌어가기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이 판국에 에너지외교를 해야 할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을 할 수 없게 됐다.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를 가를 북핵문제는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탄핵의 법적 판단은 헌재의 일이다. 하지만 야당의 탄핵 소추안 처리는 정치적으로 무리였던 것이 여론의 추이가 증명해 주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지지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해서 표정관리를 할 정도가 됐는데, 야당은 지지도 폭락으로 총선공포증에 휩싸여 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우리당이 아마 총선에서 제1당을 넘어 원내 과반수를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탄핵안 가결 방망이를 두드리며 열린우리당을 향해 "자업자득이요"라고 외쳤지만, 그 말은 야당을 향한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여론을 거스른 대가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결과를 예측하고 재신임과 총선을 연계하는 식으로 국회의 탄핵안 상정에 대응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통령은 3김에 필적하는 정치 고단자이다. 총선에서 '올인'을 경계했던 야당을 향해 진짜 '올인'카드를 던져 야당을 뒤흔들어 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헤쳐나가는 정략적 지혜를 동원하는 것을 도덕교과서 기준에 놓고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기에 일반 정치인과 달리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거나 위기의 발생을 미리 차단하는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이번 탄핵정국에서 한국 정치의 의외성을 간과함으로써 탄핵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반 탄핵'과 '찬 탄핵'으로 국민이 분열되어 정쟁에 휘말려들고 있다. 나라꼴이 어둠 속 격랑에 떠 있는 배 위에서 선장과 선원이 뒤엉켜 싸우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다가는 좌초한다.
존 하지 중장은 해방 후 미군정장관으로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사람이다. 그는 정부수립 이전 이념갈등의 혼란기에 한국인의 정치적 성향을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한국인처럼 정치적인 민족은 처음이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치인들이 파벌을 만들며 도무지 타협하려 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대립하여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대통령은 통합의 리더십을 생각해야 하고, 야당 정치인은 건전한 경쟁의 지도력을 발휘해줘야 한다.
김 수 종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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