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가회로 15번지. 얼마 전까지 재동 83번지였던 이 주소지에 헌법재판소가 있다. 창덕궁 앞을 지나는 율곡로 안쪽, 주변의 한옥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곳이다.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선고일에 사건 당사자들이 법정에 모이는 게 고작이다.서울 도심의 한켠을 그렇게 조용히 차지하고 있던 헌재가 정국의 향배를 틀어쥔 '태풍의 눈'이 됐다. 야당이 국회의 이름으로 낸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과 정국의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이다. 헌법재판관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배어 있다. 웃음기는 사라졌다. 대법관, 법원장, 고검장 등을 지낸 최고의 법률가들이지만, 헌정사에 유례 없는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 사건을 심리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과 중압감을 쉬 떨쳐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헌재에서 차량으로 10여분 가량 걸리는 광화문 네거리. 2002년 미군 무한궤도 차량에 치여 숨진 두 여중생의 죽음을 추모하는 집회 이후 '촛불시위의 메카'가 된 곳. 그 거리에 다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모이고 있다. 시민들은 탄핵안 처리를 성토하고, 헌재에 탄핵심판 청구 기각을 요구하고 있다. 70% 이상의 국민이 탄핵소추안 통과를 비난하는 상황에서 촛불시위의 대표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탄핵안 처리의 충격이 조금씩 가시자 촛불시위는 새로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두드러졌던 초기와 달리 시민단체 주도로 집회가 진행되자 논란은 증폭되는 양상이다. 경찰은 불법 집회라고 규정했고, 탄핵안 처리로 비난 여론에 직면했던 야당은 '헌재 결정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 '친노 세력의 총선 전략'이라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보수단체들은 촛불시위에 맞서 탄핵안 가결을 위한 1,00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시민사회를 대립과 갈등 구도로 갈라놓은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 사건에서 9명의 헌법재판관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헌법재판관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한 축은 불만을 갖거나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심리에 임하는 헌법재판관들의 고뇌가 깊을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따라 정치적, 이념적 대립이 더욱 심화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힐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반드시, 또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다 보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과거 역사에서 그 같은 사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총선을 앞둔 시점이다. 의도와 다르게 자신들의 주장이나 행위가 특정 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될 수 있다. 현재로선 17대 총선이 '민의의 대변자'를 뽑는 대의민주주의의 축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단체들마저 '친노 대 반노' '탄핵 찬성 대 반대'의 구도가 압도하는 정쟁(政爭)의 장으로 함몰되어 가서는 곤란하다.
헌법재판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요란한 외침이 아니라 차분히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주는 인내력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이 내려진 뒤 그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이제 헌재를 주시하며 좀더 성숙한 자세로 헌재 결정과 총선 이후 우리 사회가 안게 될 심각한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또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황 상 진 사회1부 차장대우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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