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100살 넘게 장수하시고 돌아가셨지요.외가는 제가 살던 시골 마을에서 20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찾아갈 때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어요. 할머니, 당시 저는 어쩌다 가는 외가가 우리 시골집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것에 괜히 심술이 날 때가 많았어요. 할머니가 주신 맛있는 음식도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고 외손자를 끔찍이 귀여워해 주시는 할머니 품에 냉큼 안기는 살가운 행동도 한번 하지 않았지요.
전 외가가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 있어서 방학이면 기차를 타고 가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백화점이나 온갖 동물이 있다는 동물원을 구경했다며 뽐내며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어린 마음에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은데 외가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분할 뿐이었지요. 그래도 할머니는 언제나 웃는 모습이셨어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전 외가에 좀처럼 가지 않게 되었죠. 어머니가 외가에 볼일이 있어 데리고 가려고 하면 "가봤자 우리 집보다 더 심심하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이종사촌 누나가 할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에 오셨던 일이 있었지요. 가실 때 할머니를 제가 자전거에 태워 모셔다 드렸지요.
그런데 그 때 쪽진 머리에 꽂아 둔 옥비녀가 길에 떨어지는 바람에 없어졌잖아요. 할머니는 그 사실을 자전거 타고 가던 중간에 말씀하셨는데 저는 비녀를 찾아 드리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짜증을 내 할머니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만들고 말았지요.
그 때 이후로 할머니를 뵐 기회가 자주 없었어요. 군에 갔다 오고 서울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외가에 자주 가 볼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눈이 많이 어두워져 딸(어머니)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방안에서만 지내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었어요. 그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그제서야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왔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아직도 철이 없는 제게 갑자기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속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해진 돈을 꺼내 맛난 것 사먹으라고 주실 것만 같군요.
/서상만·서울 노원구 상계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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