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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38> 아버지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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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38> 아버지를 생각하면…

입력
2004.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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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별로 자랑할 만한 분은 아니다. 술을 좋아했고 집안일은 나 몰라라 했다. 자식들에게 따뜻하지도 않았다. 만취한 아버지의 행패를 막기 위해 한밤 중 재 너머 마을 어른을 찾아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칠흑 같은 밤길을 걸을 때면 어린 나의 머리끝은 공포로 쭈뼛 섰다.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한계가 있었다.그런 아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월간지 '샘이 깊은 물'에서 '아들의 아버지'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왔다. 1994년 3월이다. 나는 망설였다. 아니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있는 그대로만 쓰면 된다"는 설호정 당시 편집장의 설득에 못 이겨 펜을 들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까닭도 있다.

아버지는 1888년 2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고아인 아버지는 사춘기 때 내 고향 경남 통영까지 흘러 들었다. 정확히 언제 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진 통영의 호주 선교사 집에 일꾼으로 들어갔다. 음악에 재능을 지녀 교회 나팔수를 하다가 봉래극장의 나팔대장이 됐다. 내가 태어나기 6년 전인 1921년 가을이다. 아버지는 앞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이금수)와 교회에서 만나 1915년 1월 결혼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 일당은 2원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40원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액수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거의 매일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새벽녘 빈손으로 집에 왔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가 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술이 취해도 자식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자기 이름 석자도 못쓰는 까막눈이었다. 그런데 악보는 기막히게 잘 읽었다. 가끔 악기와 악보를 집에 들고 와 연주했다. 트럼펫과 호른, 클라리넷, 색스폰 등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거의 없었다. 특히 클라리넷 연주를 좋아했는데 부드러운 음색과 풍부한 표현력에 스스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악보를 보면서 가곡과 당시의 유행가, 찬송가 등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근엄함과 애수(哀愁)가 뒤섞인 아버지의 얼굴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젊은 시절에는 애국 활동도 했다. 일제 초기인 1916년 통영의 애국 청년들과 함께 조선청년회관을 짓는데 앞장섰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들은 당시만해도 흔치 않던 서양 악단을 만들어 삼천리 강산을 돌며 음악회를 열었다. 아버지는 나팔수를 맡아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3년 동안 순회공연을 했다. 그리곤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통영에는 큰 벽돌집 회관이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청년단은 이내 해체됐고 이 건물은 통영여중의 교사(校舍)가 됐다. 나는 아버지 덕분에 봉래극장을 무시로 드나들며 서부 영화와 신파극 등을 맘대로 볼 수 있었다.

아들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버지 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었던 게 사실이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우리 7남매를 기르셨다. 아버지가 술꾼이라는 이유로 한때 통영교회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진다. 고아로 태어나 낯선 타향에서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독과 비애를 느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말없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아버지는 간혹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도 말씀 한마디 없었다. 모든 내면의 말씀을 악기로 표현한 건 아닌지. 장남인 나는 그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헤아릴 듯 했지만 끝내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는 전쟁 와중인 52년 2월 돌아가셨다. 태어난 지 채 1년도 안돼 죽은 첫딸 등 3명의 자식은 이미 가슴에 묻어둔 채 눈을 감은 아버지는 통영 공동묘지에 잠들어 계신다. 세상살이가 힘겨워질수록 세상 아버지들의 어깨는 쌓인 짐의 무게에 짓눌리기 마련이다. 올 봄이 가기 전에 아버지 무덤의 풀이라도 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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