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18일 부산 고신대 신학과 4년생 문부식, 같은 대학 기독교 교육학과 4년생 김은숙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흔히 '부미방'이라고 줄여 말하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방조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취지에서 학생들이 벌인 이 사건은 반미운동의 무풍지대로 여겨져 왔던 한국에서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항의를 격렬한 방식으로 실천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사건 발생 14일 만인 4월1일 자수한 문부식·김은숙을 비롯해 16명이 이 사건으로 기소되었고, 그 해 8월11일 부산지법은 사건 관련자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주모자인 문부식과 그를 의식화했다는 김현장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사건 현장에서 문부식을 도와 방화를 실행한 김은숙·이미옥 두 여학생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며, 김현장을 보호하고 있던 천주교 원주교구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에게는 범인은닉죄가 적용돼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이들은 1988년 12월에 출감한 김현장·문부식을 마지막으로 모두 감형·석방되었다.
'부미방'은 뜻밖의 무고한 희생자를 낸 방화라는 방식의 과격성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폭 넓은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사건 관련자들은 수사 과정에서의 참혹한 고문과 정권·언론사 간의 대대적인 '홍보 조정'을 통해 친공주의자들로 몰린 탓에 여론으로부터 더욱 고립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광주 학살과 관련한 미국의 책임 문제를 넘어서 한반도에서 미국이 지닌 의미를 진지하게 따져보고 캐묻는 시발점이 된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이돈명이 이끄는 이 사건 변호인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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