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수목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의 한 장면. 희수(김성수)가 한때 애인이었던 이나(염정아)와 '사랑'이란 절대명제를 놓고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다툰다. 말이 길어지자 희수는 정전을 선언하고 화장실로 내뺀다. 그러나 웬걸. 따라 들어온 이나는 남자가 소변보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늘어놓는다. 오줌 줄기가 변기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멜로디가 명징하다.2003년 11월 종영한 KBS2 '상두야 학교 가자'의 또 다른 장면. 민석(이동건)이 좌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화장실에 상두(비)가 불쑥 들어와 수다를 떤다. 처음에 당황하던 민석도 상두가 약을 올리자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맞서 싸운다.
이 두 장면은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화장실 장면'이 획기적으로 변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간 드라마에 등장한 숱한 화장실 장면의 구조와 역할은 뻔했다. 중고생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는 화장실은 왕따를 두들겨 패거나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곳, 누군가를 무자비하게 욕하는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회사원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사내 화장실은 정보가 교환되고 실마리가 풀리는 해결 창구였다. 주부들 대상 아침 드라마에서는 주로 빨래와 아이 목욕 시키기 같은 가사노동이 이뤄지는 곳으로 그려졌고 20대 꽃미남 스타가 출연하는 트렌디 드라마에서는 근육질 몸매를 디스플레이 하는 쇼 윈도우 역할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묘사된 이런 모든 행위에는 화장실의 첫번째 존재 이유인 '배설행위'는 유독 쏙 빠져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라는 장르가 '돈' '외모' '섹시한 몸' 같은 형이하학적 욕망을 진·선·미 같은 이상을 흉내낸 얄팍한 포장지로 은폐하는 전략을 구사해왔기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이 특급 호텔에서 최고급 요리를 저녁으로 먹되 그 값이 얼마인지 그것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설정도 없는 드라마에서 '배설'이 등장하길 기대하는 건 터무니 없는 일이다.
'사랑한다 말해줘'와 '상두야 학교 가자'에 등장하는 화장실 장면은 비로소 우리 드라마가 현실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또 아랫도리 욕망과 육체에 대한 열망에 관해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솔직해져 드라마가 더 이상 그걸 교묘하게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원초적 뻔뻔함을 '쿨'하다고 여기는 한 조만간 '배설의 결과물' 마저 등장하는 드라마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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