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를 쓸 때마다 내 고향 경남 통영 생각이 난다. 어릴 적 뛰놀던 통영 바다의 푸른 물결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나의 낭만적 기질은 통영의 수려한 자연 환경 영향 때문인 지도 모른다. 유치환 김춘수 박경리 윤이상 등 이 고장 출신 예술인이 많은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1927년 11월 태어난 나는 42년 봄 경성사범학교 입학 전까지 고향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름은 김평주, 어머니는 이금수였다. 아버지가 고아여서 기독교 신자인 외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전도사를 지낼 만큼 독실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으나 스무 살 때인 1915년 경남 진주의 성경학당에 입당, 3개월 과정을 수료했다. 그녀는 교회에서 주는 많지 않은 봉급과 삯바느질로 우리 형제들을 키웠다.
어머니는 내리 딸 넷을 낳았다. 셋째인 애희 누나 빼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는 아들 낳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서원(誓願) 기도를 올리며 아들을 주시면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했다. 나를 목사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 근처에 살던 일곱 살 때쯤이다. 앞집 마당의 감나무 가지가 우리 집으로 넘어와 빨간 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나는 무심코 한 개를 따서 한 쪽을 씹었다. 그 순간 어머니가 크게 화를 냈다. "지푸라기 한 가닥도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꾸짖음에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앞집에서 도둑질이라고 문제 삼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평생 정직을 도덕의 최고 덕목으로 삼아왔다.
초등학교는 우리 나이로 열살 때인 36년 입학했다. 당시 인구 2만의 통영에는 한국인 초등학교가 하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입학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34년부터 입학원서를 냈으나 떨어졌다. 어머니 말로는 35년에도 입학이 좌절되자 돌멩이로 땅을 무작정 파헤치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3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려운 집안을 돕겠다며 한여름에 나무상자를 만들어 '아이스케키'를 팔러 나갔다. "아이스케키 사이소"를 외쳐 댔으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30개 정도의 아이스케키는 녹아 들었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샀는데 막막했다. 그런데 마침 배를 수리하는 공장에서 20여명의 인부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본인 반장은 측은했는지 반 이상 녹은 아이스케키를 몽땅 사 주었다. 일본 사람이었지만 눈물이 핑 돌 만큼 고마웠다. 내가 사업에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좌절하지 않은 건 이 때의 경험 덕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게 마련이니까.
나는 공부를 꽤 잘했다. 2학년 때는 읽기대회에서 전교 1등을 했다. 졸업식장에선 도지사 특별상을 받았다. 6학년 담임인 오점량 선생님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가정형편 상 중학교 진학을 바라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오 선생님은 "경성사범학교는 가난한 아이들도 갈 수 있다"며 격려해주었다. 그리고는 힘겹게 입학원서를 써 주었다. 교장 선생님이 "경남 전체에서 조선인 한 사람 합격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 인데 무슨 소리냐"고 나무라자 그는 "사표를 내겠다"고 버텨 결국 도장을 받아냈다. 그런데 합격하고도 병마로 학업을 중단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3학년 담임인 설 석 선생님도 잊지 못한다. 그는 우리 셋방의 도배를 손수 해주는 등 나를 끔찍이 아껴주었다. 당시 어머니는 가족을 이끌고 거제도 옥포교회의 전도사로 갔고 통영에는 셋째 누나와 나만 남아 자취 생활을 했다.
석 선생님은 또 내게 금지된 조선 동요를 스스럼없이 가르치는 가 하면 3·1운동과 독립군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결국 그는 얼마 후 일본 경찰에 사상범으로 체포됐고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 자결주의, 민주주의와 인권 등에 남들보다 일찍 눈 뜬 것도 그 선생님의 영향이 아닌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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