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매캐한 공기속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어느날 사이판 여행을 결심했다. 여행으로 말하자면 동서고금의 찬란한 문명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만 숨가쁜 일상에서 잠시 이탈해 몸과 마음을 쉬는 휴양여행이 으뜸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4시간, 상하(常夏)의 나라 사이판.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피곤한 육신을 눕혔다가 햇살에 피부가 달아오를 때면 에메랄드 빛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식히리라. 오톨도톨한 산호초 사이로 형형색색의 사랑스러운 열대어와 눈을 마주치면 윙크라도 해주리라. 진한 아로마향을 맡으며 마사지를 받고 밤에는 차가운 맥주병을 들어 남국의 밤을 노래하리라. 몸과 마음이 잊었던 태초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 이보다 더한 웰빙여행이 있을까.열대어와 노닐다 사이판의 값비싼 진주 마나가하
서태평양 한복판에 자리잡은 산호섬 사이판에서도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 마나가하섬이다. 사이판 북동부에 자리잡은 이 작은 섬은 걸어서 한바퀴 빙 돌아도 15분 남짓이다. 그야말로 미니섬이지만 사이판여행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첫 손에 꼽는 휴양지이다.
오전 10시, 포트 오브 사이판에서 배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자 야자수 그늘을 드리운 채 투명한 바다위로 그림처럼 솟은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얕고 투명한 바다와 바닷조개가 부스러져 만들어낸 순백의 모래사장. 스노클링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백사장 옆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장비를 대여했다. 스노클링용 마스크과 안전조끼, 물갈퀴 세트에 12달러. 일반 비치 대여료(6달러 안팎)의 두배다. 일본인 안내인이 대여점 앞 오른쪽 바다는 파도가 세고 깊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장비를 차려입고 바다속으로 풍덩 들어가니 밤 비행기로 달려온 휴지 같은 몸에 청량한 바다색이 순식간에 물든다.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코 대신 입으로 숨을 쉬기 때문일까. 말이 없는 세상은 이 얼마나 평온한가. 발아래 산호초 사이로 새파란 줄무늬를 가진 노랑색 열대어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이방인은 아랑곳없이 유유하게 꼬리를 흔들며 간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주위엔 총천연색 열대어 천지다. 아무리 손 휘저어도 그들의 평화를 깰 수 없다. 마나가하에서 오후 2시 배를 타고 다시 나온다. 마나가하 여행은 1인 하루 4시간으로 제한돼있으며 모든 사람은 오후 4시엔 섬을 나와야 한다. 섬 이용료는 70달러. 일과를 마친 섬은 자연의 치유력에 기대어 스스로를 정화한다.
동심으로 돌아가다 로타의 스위밍 홀
사이판 사람들은 로타를 '프렌들리 아일랜드(friendly island)'라고 부른다. 익명성이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되는 정보문명시대에 이 섬 사람들은 아직도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손을 흔든다. 인구라야 기껏해서 8,000명선.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라도 정답다.
로타는 사이판과 괌사이에 있는 작은 섬.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로 30분이면 닿는다. 왕복 비행기 삯은 150달러. 로타공항 바로 옆에서 차를 렌트해 일주하는 것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원시 그대로의 자연림을 헤치며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로타 북부해안의 천연 수영장이다. 그저 '스위밍홀'이라는 이름에서 로타의 순박함이 느껴진다.
스위밍홀은 바닷바위와 산호초가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바닷바위 바깥쪽으로는 쪽빛바다가 몰아쳐 만들어내는 거대한 포말이 쉴새없이 솟구친다. 스위밍홀 옆에는 햇빛을 피하기 위한 작은 정자가 하나 있을 뿐 옷 갈아입을 곳이 없다. 행여 누가 볼까 가슴 졸이며 인근 바위 뒤로 돌아가 얼른 수영복을 갈아입는다. 다 갈아입고 보니 아뿔싸, 등뒤 높은 도로에서 원주민 몇이 한담중인 것이 보인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기개가 불끈 솟는다. 에라, 알궁뎅이 한번 보였다고 인생이 바뀔거냐.
바위와 산호초에 갇혔지만 파도가 바위를 때릴 때마다 밀려드는 조수로 물은 수시로 바뀐다. 바위위로 미끄럼질쳐서 스위밍홀로 풍덩 빠진 바닷물고기들이 어리둥절 물속에서 맴돈다. 다 큰 어른들도 풍덩풍덩 물장구를 친다. 몇몇은 파도에 깎여 평평해진 바위에 앉아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물미끄럼을 탄다. 누군가 "팬티 찢어진다" 소리치자 왁자한 웃음이 물위로 경쾌하게 부서진다.
플루메리아 꽃향기에 취하다 만디 아시안 스파
사이판에서의 마지막 밤은 스파. 만디 아시안 스파는 사이판에서 손꼽히는 명망높은 스파다. 사이판 북부 마피산에 자리한 마리아나리조트내에 있다. 릴렉싱풀과 사우나, 아로마테라피 스팀 사우나, 자쿠지, 꽃 목욕탕 등의 시설을 갖추고있다.
신선한 플루메리아 꽃향기가 은은하게 번지는 가운데 스파 마사지룸으로 들어선다. 작은 연꽃처럼 생긴 플루메리아는 사이판을 대표하는 꽃으로 향이 강하다. 옷을 벗고 매트위에 엎드리니 햇살에 익은 피부위로 남국의 달콤한 바람이 가슬가슬 속살댄다. 정신을 정화시킨다는 오일을 이용해 마사지하는 테크니션의 손놀림은 바람보다 더 부드럽다.
한국의 목욕탕 마사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사이판식 스파가 좀 간지러울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꿈결같이 부드러운 손맛은 따뜻한 위로 같은 힘이 있다. 전신 마사지에 보통 70달러, 얼굴은 포함돼있지 않다. 잠깐 잠들었다가 문득 강렬한 꽃향에 홀려 눈을 뜨니 테크니션이 미소띤 눈으로 방을 나간다. 멀리 코발트로만 만든 일곱빛깔 무지개 같은 바다가 눈을 씻어준다. 삶이 이렇게 단순하고 평온할 수 있을까, 잠깐 탈속의 유혹을 느낀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 여행수첩
사이판과 로타는 세계에서 가장 기후가 안정된 곳이다. 쾌적하게 맑은 날의 평균 온도는 섭씨 27도이며 연중 기온차도 1∼2도에 불과하다. 습도는 70%로 높은 편이지만 연중 무역풍이 불어 불쾌지수가 높지않다.
계절은 크게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그러나 7∼9월인 우기도 우리나라의 여름과 달리 열대성 폭우인 '스콜'이 가끔 쏟아지는 정도여서 여행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국내서 사이판으로 가는 비행기는 아시아나항공(1588-8000) 하나 뿐이다. 매일 밤 10시 20분 인천공항에서 뜬다. 사이판에서 로타까지는 컨티넨탈 마이크로네시아와 퍼시픽 아일랜드항공(PIA)이 운항한다.
사이판에는 특급호텔들이 즐비하다. 그중 사이판 남부 수수페지역에 자리잡은 사이판 월드 리조트(670-234-5900)는 원래 일본계 다이아몬드호텔이었던 것을 지난해 8월 한국 월드산업이 인수, 사이판내 최초의 한국계 특급호텔이 됐다. 올해 말 리노베이션이 마무리되면 사이판내 가장 큰 길이 220m짜리 워터슬로프와 사이판서 유일한 파도풀장을 갖춘 워터파크가 호텔내 탄생한다.
사이판과 로타에서는 또 킹피셔 골프클럽(670-322-1100)을 비롯 6개의 골프장이 완비돼있으며 만디 아시안 스파(670-322-0770)외에 각 리조트마다 독특한 스파시설을 갖추고있어 가족 모두를 위한 선택관광의 폭이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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