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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라운지] 중앙대 정봉섭 체육부장-농구천재 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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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라운지] 중앙대 정봉섭 체육부장-농구천재 허재

입력
200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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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30년 농구인생을 정리하고 은퇴한 '농구 천재' 허재를 바라보며 가장 감회가 깊었던 사람은 중앙대 정봉섭(61) 체육부장이었다. 정 부장이 없었다면 오늘의 농구천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듯 허재는 13일 짬을 내 중앙대 안성캠퍼스로 스승을 찾았다. 두 사람의 만남을 취재했다. /편집자 주

인연은 거칠고 사소하나 그 얽힌 실 타래를 잇고 끊는 건 사람이다. '농구천재' 허재(39)와 정봉섭 부장의 만남 역시 그랬다. 1977년 정 부장이 우연히 제 머리보다 큰 농구공을 요리조리 드리블하는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놈 참 귀엽네" 하고 끝냈다면 허재는 있으되 '농구대통령' 허재는 없었을 터. 아니 한국 농구의 틀이 바뀌는 지각변동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재의 은퇴를 두고 가장 소회가 많을 정 부장이지만 정작 허재와의 만남은 기자의 기대와 달리 담담한 모습이었다. 도통 말은 없고 이심전심, 염화미소다. 하니 어쩌랴! 그 세월의 깊이를 살짝 비집고 들어가보는 수밖에.

노(老)스승은 제자에게 점심(게장백반) 대접하러 직접 차를 몰았다. 제자는 "선생님, 제가 몰죠"라는 인사치레도 없다. 스승 역시 "허허, 허재 피곤하잖아" 하곤 그만이다.

제자 : "부장님! 학교 안에 편의점이 있네, 우리 땐 먹을 거 사느라 읍내까지 갔는데…"

스승 : "응.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 지금은 천국이야."

세상이야기, 아이들과 주변 안부까지 묻는 짧은 대화는 흡사 형제 같다.

식당 안, 제자는 스승의 잔이 빌 때마다 잔을 깨끗이 소매에 닦아 공손히 술을 부었다. "당뇨도 있으신대 약주는 조금만 드세요"라고 걱정하자 스승이 응수한다. "너만큼 마시겠냐? 너나 조금 마셔라."

두주불사로 유명한 허재가 음주운전 등 숱한 사고(?)로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가슴앓이를 했던 정 부장이다. 그는 "품 안(중앙대 시절)에 있을 땐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니까 내가 직접 나서 변호도 해주고 헛소문 퍼뜨리는 놈들 호통치기도 했다"며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어느날 '초가(당시 농구부 숙소)'에서 살 부대끼며 합숙훈련을 하는데 허재가 룸살롱에 틀어박혀 아가씨와 함께 양주를 3병이나 비웠단다. 화가 난 정 부장이 소문의 근원지인 아가씨를 찾아 따져 물었더니 "허재랑 마셨다고 하면 손님이 많아져서" 헛소문을 퍼뜨렸단다. 스승의 말에 허재는 그저 "부장님께 늘 죄송하죠" 한다.

그뿐이랴. 중대 농구부가 허재의 놀라운 개인기와 정교한 세트플레이로 돌풍을 일으키며 각종 대회를 휩쓸자 허재에 대한 상대팀의 경계가 갈수록 격해졌다. 상대선수가 고의로 허재를 때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허재를 지킬 요량으로 팔 걷어붙이고 나선 덕분에 정 부장은 네 차례나 징계를 당했다. 그는 스스로 "별 4개짜리 전과자"라며 웃었다.

허재는 "대학에선 연대 고대, 실업에선 현대 삼성이 버티고 있던 시절이라 많이 힘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부장님이 날 믿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중대 신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날 믿었다"는 허재의 말에 정 부장의 회고가 이어졌다. "실업이든 대표팀이든 허재를 감당할 감독이 없었죠. 감독이 이야기하면 딴청 피우는데 누가 좋아합니까? 워낙 승부욕도 강하고 자신감도 넘치는 아이라 저도 그냥 하는 대로 가만 놔둔 거밖에 없어요."

허재는 그런 선수였다. 술독에 빠진 다음날 정 부장이 '오냐, 한 번 당해봐라' 심산으로 독하게 연습을 시키면 다른 선수는 다 쓰러져도 끝까지 버티는 게 허재였다. 슬쩍 농구장을 찾아 허재가 안보이면 꿍한 마음에 말도 안 걸던 정 부장이지만 다시 찾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는 게 허재였다.

"독하긴 또 얼마나 독한데…" 정부장의 말이 계속됐다. "86년인가? 삼성이랑 경기를 하는데 허재가 쥐가 난 거야. 코트에 뒹굴다가 갑자기 옷 핀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핀으로 자기 무릎을 수십 차례나 찌르는데 섬뜩하더라니까. 덕분에 이겼어, 허허."

매도 많이 맞았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허재만 잡으면 농구부 전원을 통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 부장은 "(김)유택이는 때리면 저만치 가서 울어요, 근데 허재는 때려도 씨∼익 웃고 말아요"라고 허허 웃는다. "부장님 마음을 다 아니까 그런 거죠" 허재가 한마디 걸친다.

"주전자나 나르던 3류 농구선수"로 본인을 평한 정 부장은 "허재는 농구 천재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허재란 선수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에요. 중학교 시절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슛을 200개씩 던진 앱니다. 대학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한 일요? 저는 그냥 지켜봤을 뿐입니다. 남들이 장난하냐고 욕해도 허재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하도록 놔두고 코트에서 허재가 맡을 자리 정해준 거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정 부장 자신도 "헉 저게 뭐야!" 외마디 비명을 지른 허재의 멋진 플레이가 세상에 선보였다.

허재는 중대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부장님이 야간 훈련 끝나면 계란이 수북이 덮인 토스트를 나눠주시곤 했어요. 늘 우리 곁에 있었고 운동만 생각하셨어요. 저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넌 잘할 것"이라고 대답한 정 부장이 지도자로서 충고를 했다. "작전이 뭐야? 딱 한가지, 이기는 거야. 다른 작전은 필요 없어, 그러려면 선수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나둬야 해. 우리 그때 농구 참 '이쁘게' 했잖아." 허재가 고개를 끄덕인다.

허재의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을 기자를 통해 전해들은 정 부장은 아쉬운 표정이다. "중대 후배들 우르르 몰고 갔어야 했는데…" "정식 은퇴식 하면 오세요." 허재가 스승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상대를 만난 게 일생일대의 행운"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둘의 행운이 아니라 국내 농구계의 행운이었다.

/안성=글·사진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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