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쓸 줄 몰라서 연필로 대학 노트에 썼어요. 쓰다가 너무 지쳐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제가 만났던 아이들의 간절한 눈길이, 힘없는 손길이 떠올라 그럴 수 없었어요."탤런트 김혜자씨가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연예인들이 책을 내는 것은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13일 출간된 그의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 미래 펴냄)의 의미는 각별하다. 1992년 국제 구호 단체인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 땅을 밟은 이래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르완다 방글라데시 라오스 그리고 북한과 아프가니스탄까지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와 여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녔던 그의 11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다. 그는 보고 느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방송 활동도 중단한 채 집에 틀어박혀 1년 3개월을 꼬박 글쓰기에 매달렸다.
"산다는 게 참 이상해요. 사람들은 저를 뛰어난 연기자, 한국의 여인상, 어머니상, 언제나 관심과 화려한 조명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그렇게 생각하지만 늘 끝 모를 허무감이 들었어요." 연기자로 쉼 없는 사랑을 받아온 그지만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라는 근본적인 질문 만큼은 비켜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월드비전 한국지부장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줬다. 나눔과 베품이야 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참 이유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끝내고 딸애와 유럽여행 가려던 참이었는데 친선대사로 아프리카에 같이 가는 게 어떠냐는 전화가 왔어요. 영화 '장원'에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숲을 요정처럼 뛰어 다니던 오드리 햅번이 떠올라 덥석 가겠다고 했죠." 그러나 15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타고 에티오피아 아마라주볼로에 내렸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가난과 전쟁에서 피어난 '슬픔의 먹구름'과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 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해마다 수십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고 6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사막을 곡예 하듯 넘었다. 단돈 100원이 없어 2∼3일씩 굶는 게 예사인 케냐 소녀 에꾸아무,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는 시에라리온의 소년병 모하메드 같은 세상의 고통 받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 황열병도, 멀미나 설사도 그를 막지 못했다. "뷰티 산업 규모가 수조 원이라고 하고 애완동물에게 수백 만원씩 쓴다는 오늘날에 왜 다른 아이들은 800원짜리 항생제 하나가 없어서 장님이 되야 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있는 아빠의 배 위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어야 하나요?"
지구상에서 매일 3만5,000명의 아이가 굶어 죽거나 총알받이가 되고 있는 '신의 침묵'을 그는 순순히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친선대사 활동은 물론 매년 세계 각국의 어린이 50명과 결연을 맺어 학자금, 생활비를 지원하고있다. 2003년 10월부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시에라리온에서 내전으로 피해를 입은 가정을 골라 식량과 기술 훈련을 제공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주는 '마담 킴스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팔아 버는 돈도 모두 가난으로 최소한의 삶조차 허락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기탁할 예정이다. 그렇게 김혜자는 '사랑만이 희망'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조금씩 증명해 나가고 있다. "그 애들을 도와 주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게 슬프고 부끄러울 수 밖에 없으니까요."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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