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참여정부의 안보 정책 지침서로 발간한 '평화 번영과 국가 안보'라는 책자가 국민의 정부 때 제기됐던 주적 논쟁을 재현시키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이 지침서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전통적 위협' 또는 '직접적 위협'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주적이라는 용어를 피해갔다는 데 있다.보수적 시각에서 볼 때 이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아직도 대남 적화 통일을 목표로 하는 통일전선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군 정치와 강성대국 기치 하에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우리의 '으뜸가는 적'으로 명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원래 주적 개념은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 평가에 쓰이는 용어이다. 그러나 국제 관례상 현시적 또는 잠재적 위협이라는 표현은 쓰지만 특정 국가를 주적으로 규정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상대국 역시 그 국가를 주적으로 간주하여 적대 관계의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미국도 북한을 '악의 축' '불량 국가'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주적으로 설정하지는 않고 있다. 이는 아랍―이스라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2000년 6·15 공동선언 채택 이후 남북 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좀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적대 관계에서 평화 공존 관계로 전환하려고 노력하는 현 시점에 북을 주적으로 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이 지침서는 북한의 핵 개발을 '우리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는 등 북한의 위협을 주적 못지 않은 표현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을 주적으로 고착시킬 경우, 두 가지 부정적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그 하나는 위협 평가의 경직성에 따른 미래 안보의 불투명성이다. 중·장기적으로 주한 미군의 감축, 일본의 재무장, 그리고 중국의 지역 패권 야망 등을 고려한 다면적 위협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북한 주적론에 매달리다 보면 미래의 위협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국방 개혁에 주는 부정적 함의다. 일반적으로 전략, 전술, 전력 구조, 무기 체계, 군사 배치는 위협 평가와 미래전의 양상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한다면 기존의 대북 억지 전략과 지상군 중심의 전력 구조 및 무기 체계를 계속 유지·강화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국방 개혁의 두 축인 육·해·공군의 균형 발전을 통한 전력 구조 개편과 첨단 과학기술군으로의 전환은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냉전형 북한 주적론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방 개혁을 지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번 안보 지침서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포함한 미래의 새로운 불특정 안보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더욱 신축적인 위협 평가가 요청된다 하겠다.
물론 북한도 변해야 한다. 단순히 원쑤, 과녁, 괴뢰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한다고 해서 남측의 안보 우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주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설득될 수 있도록 북 핵 사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고 재래식 군사 부문에서 신뢰 구축, 군비 통제, 군축 협의 등을 과감히 수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연세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