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기억을 더듬어 본다. 북한 심장부인 평양 시내 보통강변에서 '류경 정주영체육관' 준공식이 있었다.나는 어린 시절 휴전선 인근 작은 마을에 살았다. 정겨운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맑은 개울이 있었으나 한편으론 반공 이데올로기의 학습장이었다. 주변은 미군 캠프가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초콜릿 사탕을 잘 주는 넉넉하고 마음씨 좋은 미군이 가득했다. 앞뒤 산으로 올라가면 여기저기 엽서 크기의 붉은 원색과 조잡한 단어 일색인 '삐라'가 너무 쉽게 눈에 띄었다. 주워 가면 작게는 학용품, 크게는 포상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괴뢰, 빨갱이 등등….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도 유해한 환경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범생이'로 성장했다. 이후 서슬퍼런 군사정권 하에서도 나의 북한은 항상 이질적이고 참혹한 동토였다. 세칭 사십 불혹에도 태생적 한계를 떨쳐버리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업보랄 밖에.
북으로의 월경은 몇 발치 앞 횟가루선을 넘는 것으로 전부였다. 베를린의 시멘트 장벽도 그 날은 없었다. 서울에서 개성―평양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로 평양에 닿는 데는 3시간이 채 안 걸렸다. 북한 권력이 집결해 있는 평양은 미상불 아프리카만큼이나 먼 곳도, 못 갈 곳도 아니었다.
일정을 마치고 남한 땅에 들어서는 자유로에는 가로등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며칠간 별세계에 있던 감흥이 일순간에 사라지면서 언제였나 싶게 이곳에 익숙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침은 평양에서, 점심은 개성에서, 저녁은 서울에서였다. 남북은 그렇게 찰나에 불과한 것을….
북은 최소한의 치부를 보여주면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안방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숨겨서 될 일만은 아니라는 절박한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기치로 내건 개방과 개혁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북한의 리더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유야 어떻든 분단국에 산다는 것은 비극이고 누군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의사 한 분이 "생각의 차이는 그래도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사람의 체위는 되돌아 올 수 없게 된다. 그 쪽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많이 흘렀다는 느낌이다"라고 충격적인 넋두리를 했다. 완전히 다른 민족·동포가 된다는 것이 아닌가?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반갑습니다…." 동질감은 흘러간 노래 가사에서나 찾아야 하나 생각하면 지금도 답답해진다.
평양행의 기회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 그 때는 우리 가족, 이데올로기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과 부담스러운 제재가 없는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똑부러지는 말투에 장래 희망이 인민배우인 '만경대소년학생궁전' 여학생의 미소가 아른거린다.
오 동 수 현대상선 상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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