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진보의 불모지였던 한국은 1980년대 들어 진보운동의 폭발을 경험한 바 있다. 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은 1980년 봄의 광주학살이다. 이 점에서 사라졌던 진보운동의 복원에 가장 기여한 것은 좌파 지식인들이 아니라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이었다. 이 같은 역사의 역설을 바라다보면서, 가끔은 그가 군에 위장취업해 있다가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켜 진보운동을 복원시키기 위해 광주학살을 일으킨 위장 취업 간첩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시민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고, 한나라당은 이를 좌파적 발상이라고 공격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시민혁명에 불을 당긴 것은 노 대통령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노 대통령 탄핵으로 타오르는 있는 촛불 시위 등 시민들의 분노한 저항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민혁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탄핵 후 치솟고 있는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보여주듯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을 통해 열린우리당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거운동을 해 주었다. 한마디로 경기 종료 5분 전에 5골짜리 자살골을 넣은 꼴이다.
사태가 이러하기에, 노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같은 탄핵을 통해 엉뚱한 방법으로 노 대통령을 돕기 위한 깊은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기이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도부가 탄핵의 역풍에 당혹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지도부가 당혹해 하고 있다는 것은 역풍을 예상하지 않았다는 의미인 바, 거대한 역풍이 있을 줄 알지만 대통령의 행동이 잘못됐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총선 패배를 감수하면서도 탄핵을 강행한 것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역풍을 예상하지 못할 수 있는가. 하긴 얼마 전 이 난(2월 24일자 '착각의 정치')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최병렬 대표 체제 하의 한나라당이 민심을 잘못 읽고 시대착오적인 착각에 빠져 서청원 의원 석방결의안 통과와 같은 자살골을 넣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탄핵안은 민주당까지 가세해 결정적인 자살골을 넣은 자폭의 정치의 결정판이다.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자폭의 정치라는 점에서 노 대통령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탄핵 사태는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이 총선 전략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부하고 야당을 도발해 탄핵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탄핵 전날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강경 대응이 역풍을 맞으면서 청와대가 당황해 탄핵 당일 뒤늦게 사과 성명을 발표한 것을 볼 때, 탄핵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처럼 탄핵이 노 대통령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고 어차피 사과를 할 것이었다면, 사태 초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사과를 했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이 같은 난리를 피우지 않았어도 될 것을 강경 대응이라는 자충수로 개인적 불명예와 엄청난 국력 낭비를 자초한 것이다. 특히 탄핵 전날 기자회견의 강경 대응은 탄핵안에 부정적이었던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과 자민련까지도 탄핵에 동조하도록 만든 자폭의 정치의 전형이었다.
탄핵 사유의 경중을 따져 볼 때, 탄핵은 부당한 것이고 헌법재판소는 당연히 이를 각하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탄핵 사태에 대해 국민들이 총선 투표를 통해 그 책임을 물어 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도 이제 자폭의 정치를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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