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3월16일은 베트남 전쟁의 가장 추악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저질러진 날이었다. 이 날 미군 11 경보병 여단 찰리 중대 소속 군인 150명은 윌리엄 캘리 중위의 인솔 아래 남베트남 밀라이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 진입하기 직전 캘리는 중대원들에게 되풀이 말했다.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왔다. 수색하고 파괴하라." 이 수색 파괴 작전 동안 미군은 단 한 명의 적군도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500여 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여자, 어린아이, 노인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도랑으로 내몬 뒤 벌집을 만들었고, 널브러진 시체를 총검으로 난도질했다. 뒷날 발견된 몇몇 시신들의 가슴에는 'C Company'(찰리 중대)라는 문자가 칼자국으로 새겨져 있기도 했다.한 마을 주민의 거의 전부를 잔혹하게 죽인 이 사건은 베트콩 요새를 허문 빛나는 승리로 보고되었다. '성조(星條)'지는 장문의 기획 기사에서 베트남인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미군의 용기를 치하했고,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찰리 중대에 직접 축전을 보냈다. 밀라이 사건은 '민간인 20명이 우발적으로 희생된' 성공적 작전으로 정리됐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고 찰리 중대원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은 두 해 뒤였다.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와 캘리 중위를 포함해 25명이 기소됐지만, 그 가운데 캘리만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이 선고됐다. 캘리가 사흘째 복역하던 날,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그를 교도소에서 빼 가택연금 시키도록 명령했다. 캘리는 안락한 아파트에서 애완동물을 키우고 방문객을 받고 요리도 할 수 있었다. 종신형은 20년 형으로, 10년 형으로 줄어들었고, 1974년 캘리는 세 해 동안의 가택연금 끝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리고 보험업을 시작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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