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그릇은 오랫동안 한국여인의 가족사랑을 말없이 전해준 부엌살림이었다. 날씨가 싸늘해지는 계절로 접어들면 집집마다 고이 간직해 둔 놋그릇을 꺼낸다. 전기밥솥이나 보온밥통은 상상도 못 하던 시절 놋그릇을 대신할 주방용기는 없었다. 미처 저녁시간에 대지 못한 식구가 있는 집에선 주발이나 합에 밥을 담아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두곤 했다. 혼사를 앞둔 딸을 둔 집에서는 주발 수저 세수대야 요강을 미리 마련해두어야 마음이 놓였다. 그것도 안성유기면 금상첨화였다. 불과 반세기 전의 그리운 풍경이다. 이렇듯 놋쇠로 만든 유기(鍮器)는 우리 네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놋그릇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 그나마 다행이지요. 놋그릇이야 말로 장점이 많습니다. 재질로 보아도 놋쇠만큼 좋은 금속이 없는데다 기능 또한 우수합니다. 모양도 단아하고 아름답지요."
안성의 유기장 김근수(金根洙·89)옹은 유기의 부활이 잃었던 자식을 되찾은 것만큼이나 기쁜 모양이다. 그는 '안성맞춤'의 고장에서 유일하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다. 유기가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면서 빚어진 안타까운 현상인 것이다. 82년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77호로 지정된 그는 공방보다 전시장을 지키는 날이 많아졌다. 나이가 너무 들어 근력이 달리는 탓이다. 해방되던 45년부터 살아온 봉남동 자택 1층에 전시장 겸 매장인 '안성마춤 유기공방'이 있고 유기를 만드는 공방은 미양공단에 자리잡고 있다.
'안성맞춤'은 안성의 장인정신에서 태어난 언어다.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주식으로 삼던 지방의 경우 그릇이 투박하고 컸던 데 반해 안성유기는 쌀밥을 주식으로 먹던 서울과 경기일원의 사대부와 양반가에 주로 팔려나갔다. 조형미와 기능이 비할 데 없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장에 내다 판 평민용 그릇은 '장내기', 양반가의 주문에 맞춰 제작한 유기는 '모춤(맞춤)'이라고 불렸다. 안성유기의 특징은 바로 모춤에 있었다. 안성맞춤의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안성유기는 조선시대부터 한국인의 사랑을 가장 받았던 그릇이었다. 해방직후에만 해도 안성 일대에만 공방이 20여 개에 달했다. 심지어 담뱃대만 만드는 전문 업체도 여럿 있었다. 유기가 사양길로 들어선 결정적 원인은 연탄이었다. 가정은 물론 유기의 대량 소비처인 음식점의 취사·난방연료로 연탄이 주종을 이루면서 가스에 변색하기 쉬운 유기는 알루미늄과 스테인레스 스틸 제품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물자가 귀하던 시절 탄피 등 질이 나쁜 원료로 만들면서 안성유기의 이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연탄의 보급은 결정타였다.
갈림길에 선 김옹에게 탈출구가 열렸다. 별다른 수출품이 없던 50년대 말 한미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수출길이 뚫린 김옹은 풍화산업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7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김옹의 유기는 골동품적 관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문화상품을 수출한다는 자부심이 무척 컸고 60년대 한창 때에는 연간 수출액이 10만 달러가 넘기도 했다. 하지만 수출을 중단한지도 오래됐다.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값싼 제품이 미국시장에 물밀 듯 들어가면서 경쟁력을 상실한 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린 것이다. 유기공방은 3D업종이어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 국내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생산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현재 김옹의 공방에는 10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유기의 주소비처는 아무래도 한식당이다. 서울의 한 한정식업소에서는 놋그릇 5,000개를 한번에 맞춰가기도 했고 냉면대접으로 수백개를 주문해가는 음식점도 있다. 가족용으로 사갔다가 마음에 들어 손님용이나 선물용으로 주문하기도 한다. 김옹의 공방에서 나오는 식기로는 5첩, 7첩, 9첩 반상기가 있다. 혼사용품으로는 식기 수저 요강 세수대야, 제사용품으로는 향로 향합 촛대 수저 주전자 등이 있고 생활용품과 불구(佛具)도 수십종이다. 40개짜리 제기 한 벌의 값은 126만원이나 나가며 대접과 주발 한 벌은 5만∼6만원이다.
일제강점기 고향 안성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20세 때 일본인이 경영하던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 판매사원으로 입사했다. 그 것이 유기장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해방을 맞은 김옹은 정광사를 공동으로 경영하면서 뒤늦게 유기제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은 당시 내로라 하는 장인이었던 김기준(金基準)이었다.
"그 당시엔 제품이 없어서 못 팔았어요. 장날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전국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어 며칠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김옹은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안성유기공업사를 세워 독립했다. 그리고 세상의 외면 속에서도 안성유기의 생명줄을 홀로 붙잡고 버텨왔다. 이제 김옹의 뒤는 아들과 손자가 잇고 있다. 아들 김수영(金壽榮·55)씨는 인간문화재 전수교육조교이자 공방을 책임지고 있다. 손자 둘도 대학을 졸업하고 기술을 익히고 있다.
유기는 한국인의 심성을 담아낸 공예품이라고 한다. 고아한 분위기가 피어나는 그 자태에는 앞서간 사람들이 가꿔온 생활의 멋이 감돌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주물유기 정교하고 광채 방자유기는 내구성 탁월
유기는 놋쇠로 만든 기물을 일컫는다. 한국 전통놋쇠의 경우 구리와 주석성분이 72 대 28의 배합비율을 이뤄야 가장 좋은 품질의 제품이 나온다.
안성은 주물유기의 고장이다. 국내에 전해오는 유기제작 방법으로는 주물(鑄物), 방자(方字), 반방자기법의 세 가지가 있다. 주물기법은 불에 녹인 쇳물을 틀에 부어 필요한 기물을 만들며 방자기법은 놋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해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간다. 반방자기법은 주물과 방자로 절반씩 기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방자유기의 고장은 평북 납청이며 반방자유기는 전남 보성과 순천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유기장'·안귀숙 지음).
김근수옹은 주물유기의 장인이다. 그렇지만 그의 공방에서는 주물과 방자유기를 동시에 제작하고 있는데 이제는 주물보다 방자제품이 더 다양하고 생산량도 많다. 그릇 종류는 대부분 방자기법으로 제작한다. 방자유기는 떨어뜨려도 찌그러질 뿐 깨지지 않을 정도로 내구성이 탁월하다. 안성맞춤으로 상징되는 주물유기는 대신 생김새가 아담하고 정교하다. 유기의 생명인 광채도 뛰어나다.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 안성에서만 매년 60만개의 놋그릇을 생산했다고 한다.
유기의 재료인 놋쇠는 청동(구리+주석) 황동(구리+아연) 백동(구리+니켈)으로 대별된다. 인체에 해로운 아연과 니켈을 섞은 황동과 백동은 향로 촛대 활 화로 등 장식품의 재료다. 김옹은 청동의 종류를 유철(鍮鐵) 청철(靑鐵) 주철(朱鐵)로 세분한다. 주석의 배합비율이 높을수록 품질이 좋다. 놋그릇 중 가장 좋은 제품은 청철로 만든다.
유기제조 과정에서 가장 까다로운 공정은 주물이다. 화덕의 온도는 보통 섭씨 1,000도 이상이다. 구리가 녹으려면 보통 그 정도의 고온이어야 한다. 배합하는 주석 등 다른 금속의 용해온도는 훨씬 낮은 250∼300도 안팎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타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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